❏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장막 문(성막 문)



말씀: 출애굽기 26:34-37
요절: 출애굽기 26:36

주님은 휘장을 만들게 하신 다음에 휘장 안 지성소에 둘 것과 휘장 밖 성소에 둘 것을 구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목적에 따라 사물을 배치하듯이 주님 역시 자신의 뜻에 따라서 사물을 배치하십니다.

34절입니다.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긍휼의 자리를 두고](34).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를 두고, 그 위에 긍휼의 자리를 얹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간략하게 [거기에는 금 향로와 돌아가며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고 이 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이 궤 위에는 긍휼의 자리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지금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히9:4~5)하고 마쳤는데 지성소 안의 광경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지성소는 주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이미 전에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진리는 우리 마음의 지성소입니다.

주님은 저 하늘의 지성소에 거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는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하늘이 지성소로 들어간 사람이 없습니다. [이로써 성령님께서 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은 첫째 성막이 서 있는 동안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드러나지 아니하였다 하는 것이라.](히9:8). 길 되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을 찢으신 후에야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산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제사장들이 일년에 한번 피를 들고 두려움에 떨며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리던 것과는 달리 두려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담대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히10:19). 이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얻게 된 영적 교제를 말하는 것이며, 앞으로 있게 될 주님과의 문자적인 만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 하늘에 거하시는 동시에 현재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성소의 뜰에 해당하고, 우리의 혼은 성소에 해당하며, 우리의 영은 지성소에 해당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우리의 영에 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16-17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고전3:16~17)고 말씀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솔로몬의 성전, 헤롯의 성전과 같이 인공 구조물 속에 있는 지성소가 아닌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몸은 성막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외부와 접할 수 있는 몸,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영역인 혼,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영입니다.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으신 주님이 우리 몸 안의 어디를 지성소로 삼으시는가에 대한 문제는 명료합니다. 우리의 영입니다. 고린도전서 6:19에도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고전6:19). 우리의 몸이 성전임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6:16에는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고후6:16)고 말합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지성소이며, 우리의 혼은 주님의 성소이며, 우리의 몸은 뜰입니다. 성경은 여기서 장이 넘어 가 버리지만 말씀은 고린도후서 7:1에서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후7:1). 하나님의 성전된 몸, 혼, 영을 모두 깨끗하게 해야 할 의무가 성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전을 지키고, 희생을 드리는 영적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셨다는 진리는 어려운 진리가 아닙니다. 다만 성도들이 얼마나 자신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두려움으로 섬기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중보기도 사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지성소보다는 성소를 성소보다는 뜰을 더 중요시함으로써 지성소에 계신 성령을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거나 무시하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성소에 언약궤와 긍휼의 자리가 놓여졌다는 사실은 우리의 영을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은혜로 가득 채워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過度)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술을 마시면 몸이 알코올 기운으로 충만해집니다. 반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전파하면 나의 영은 성령으로 충만해 집니다. 반면 죄를 지으면 성령은 소멸해 버립니다. 성령은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죄에 민감하며, 부정하고 불결한 것과 접할 때 즉시 소멸되고 맙니다.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살전5:19). 마치 마취 주사를 맞은 몸이 힘이 빠지고 잠이 오듯이 죄를 지을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급격히 소멸하고 맙니다. 성령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원리가 아닙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은 영향력이나 힘이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며 살거나 믿는다고 하지만 전혀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령께서는 육신의 욕심을 거슬러 싸우시며, 우리의 혼에 명령을 내리시지만 혼이 거부할 때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지성소에 언약궤를 두어야 하고, 그 위에 긍휼의 자리를 두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은 언약의 말씀을 두어야 하며, 십자가의 피를 뿌리는 긍휼의 자리를 두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계속 근심케 한다면, 그 근심은 괴로움(Vexation)으로 변하게 됩니다.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은 곧 성령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반역하여 그분의 거룩한 영을 괴롭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돌이키사 그들의 원수가 되어 친히 그들과 싸우셨느니라.](사63:10). 성령께서는 마치 연약한 여자 친구가 혼자 눈물 질질 흘리며 슬퍼하다 뚝 그치는 것처럼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에 잠기시며, 곧 돌이켜 복수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을 통해 회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거듭 경고도 해주시지만, 만일 계속해서 이를 무시한다면, 성령을 괴롭게(vexation)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격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35절입니다. [휘장 밖에 상을 놓되 등잔대는 상 맞은편 성막의 남쪽에 놓고 상은 북쪽에 놓을지니라.](35). 여기서 휘장 밖이란 성소를 말합니다. 제사장들이 매일 들어가 섬기는 곳인데, 금 향단과 등대, 빵을 놓는 상이 다 이곳에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일은 성소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우리의 대부분의 생각이 혼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혼은 우리의 자아(self)요, 구원의 영역입니다. 두 구절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혼과 바꾸겠느냐?](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버림을 받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9:25). 여기서 자기 혼과 자기 자신(himself)가 같은 말로 쓰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혼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란 것입니다. 우리의 혼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혼을 잃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우리의 생각과 상상은 혼의 영역입니다. 의지 역시 혼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게 살기 위해 우리는 혼을 영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합니다. 성소가 지성소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혼은 영을 거슬러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음성에 복종해야 합니다. 혼은 영과의 관계와 육체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해야 합니다.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혼과 영의 관계.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순례자인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을 삼가라.](벧전2:11)/혼과 육체의 관계.

36절입니다. [너는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아마 /실/로 바느질을 해서 장막 문에 달 현수막을 만들고](36). 주님은 성막의 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성막의 문은 동편에 한 개입니다. 후에 솔로몬이 건설하는 예루살렘 성전도 동쪽으로 문이 나 있습니다. 현재 동쪽 문은 막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 때 이 문이 열린다고 믿고 있으며, 성경의 예언 역시 주님께서 예루살렘 동문으로 입성할 것임을 말해 줍니다. 지난 번에 휘장에서 공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4가지 색깔로 된 현수막을 성막문에 달았습니다. 청색, 자주색, 주홍색, 가는 아마실(흰색)의 네가지 색깔로 정교하게 짜여진 문입니다. 예수님도 한 분이지만, 사 복음서가 정교하게 어우러져서 한 분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청색은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요한복음에 해당합니다. 자주색은 왕(임금)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마태복음에 해당합니다. 주홍색은 희생양(고난)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마가복음에 해당합니다. 백색은 의로우신 완전 무죄한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누가복음에 해당합니다. 성막문의 4색실이 함께 섞여 하나의 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네 복음이 하나로 묶여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성막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들의 문이라.](요10:7). 성막문은 오직 하나 밖에 없고, 이 성막문은 희생양과 함께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문은 성막 문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나의 죄를 담당하신 희생양이 되신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수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나를 위해 희생양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성막문의 방향이 동쪽에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말씀입니다. 동쪽은 의의 태양이신 주님이 뜨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후에 에덴의 동편에 두셨습니다. 범죄한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는데 그룹들이 에덴의 동편을 지켰습니다. 동편에 문이 열린다는 것은 주님이 막아두었던 교제를 열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는 양문이 있습니다. 양문은 예루살렘 동쪽 성벽 북쪽에 위치한 사자문(일명 스데반 문)으로 들어오면, 북쪽에서 성전으로 들어오는 문을 가리킵니다. 양문 앞에는 베데스다 연못이 있는데, 이 못을 가리켜 양의 못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올 때에 희생양으로 가지 고 온 양을 씻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먼 길을 오는 동안 더럽혀진 양을 깨끗하게 씻고, 제사장에게 흠이 없음을 검사받은 연후에야 성전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연못에서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고치셨으며, 초대교회 때에는 침례 장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성막 문은 매우 넓습니다. 폭이 20 큐빗이나 되는데 약 10M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해 두셨습니다. 하지만 유일한 문입니다. 구원받는 길은 하나 뿐이며, 구원의 문 역시 하나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막 문은 영원히 열려있지 않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항상 열려 있지 않고 주님께서 닫아 버리셨듯이(창7:16-23) 은혜의 시대는 곧 종결됩니다. 환란 때 결혼 잔치의 문도 닫혔습니다(마25:1-12). 우리는 문을 통과해 들어가야 합니다. 문이 닫히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문 안에 있는가? 문 밖에 있는가? 둘 중의 하나 밖에 없습니다. 중립 지대는 없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11:28).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동쪽 성막문은 동쪽에 나 있어서 성막으로 들어 올 때는 서쪽을 향해서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해뜨는 동쪽을 향해 나아갑니다. 죄인들이 들어올 때는 석양의 그늘 같은 문제를 안고 들어오지만, 성막에서 나갈 때에는 떠오르는 태양 같은 확신과 기쁨을 갖고 나아갑니다. 태양이 비추는 빛을 안고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 희생제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새 힘과 소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주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들어가고 나오며 영적 양식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문이십니다. 문은 통하여(through) 들어가고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through)만 무엇을 해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through Christ Jesus) 무엇을 얻는가? 살펴봅시다.

●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쁨을 얻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하여금 속죄(贖罪) 받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또한 기뻐하느니라.](롬5:11).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차이는 기쁨의 유무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주님은 성도들에게 기쁨을 충만하게 주셨고,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너희에게 근심이 있으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것들을 말하옵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성취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3). 성경은 온통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교제를 나누어도 기쁘고(행2:46), 박해와 고난을 받아도 기쁘고(행5:41), 전도를 해도 기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쫓겨나면서도 기쁨이 충만했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자기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이고니움으로 가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더라.](행13:51~52). 기쁨은 참 기독교인의 표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게 되어도 기쁘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너희 믿음의 희생과 섬김 위에 /나를 헌물로/ 드린다 할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로 이런 까닭에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얼굴에 기쁨이 표현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신앙이 참 신앙이라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기쁨을 잃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기쁨의 문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군림(reign-통치)합니다. [이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군림하였은즉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더 생명 안에서 군림할 것임이라.](롬5:17). 이전에는 나의 통치자가 죄였습니다. 사망이었습니다. 육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주인은 바뀌었습니다. 생명이 다스립니다. 은혜가 통치합니다. 성령이 통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이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시며, 생명 자체이신 분 안에 있는데 매일 죽는 소리만 내고, 죽음의 그림자가 비치고, 한 숨 소리만 길게 나온다면 그는 병든 그리스도인이거나 비정상입니다. 생명이 넘친다는 것은 피곤과 스트레스 뿐 아니라 모든 연약함을 일거에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사망을 삼키는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생명의 통로요 문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항상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4).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강건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나되게 하며 주님을 위해 더욱 수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원하시는 분,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은 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를 위해 더욱 더 많은 수고를 원하시면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주십니다. 의롭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의 사역자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값없는 선물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따라 그분의 권능이 효력 있게 활동함을 힘입어 내가 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노라.](엡3:7).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은혜의 문인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5:57). 우리는 스스로 아무리 싸워도 백전백패입니다. 죄와 싸워도 이길 수없고, 마귀와 싸워도 이길 수 없고, 육신과 싸워도 이길 수없고, 세상과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약졸(弱卒)중의 약졸입니다. 그러나 이런 연약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기만 하면 강한 군사가 됩니다. 연전연승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승리의 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패배하고 있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조형제님의 은혜로운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담배를 끊는데 한 번의 기도로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담배 연기 조차도 싫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를 주신 귀한 간증입니다. 그러나 이런 승리의 간증은 일생 한 두 번, 한 두 가지 사건의 경험담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매사에 지속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으며, 누릴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바이러스는 몸에 잠복해 있습니다. 몸의 건강이 승리를 지속하고 있을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반면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질병으로 드러납니다. 성도가 승리한다는 것은 매사에 싸울 필요도 없이 이미 승리를 유지하고 누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를 얻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으며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화해하게 하는 사역을 우리에게 주셨으니](고후5:18). 하나님과 화해하면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 안에 주어집니다. 평강이 힘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가운데 하나가 폭풍우 속에서도 호들갑을 떨지 않고 평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그리스도는 평안의 통로요, 평안의 문입니다. 그리스도란 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평안 속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의 평안이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어디서 알 수 없는 평안이 이렇게 몰려 올까!! 그런 체험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며, 이런 체험이 일상 생활에서 내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관념이나 어쩌다 한 번의 경험이 아닙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의 복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들 위에 임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통하여 /성/령을 약속으로 받게 하려 함이라.](갈3:14).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어떤 복을 받았는지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이 복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분은 창세기 12장부터 몇 번씩 통독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들의 성취는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자녀로 입양하셨으니](엡1:5).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는 힘을 얻고 강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불가능이 없듯이 그리스도인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초능력자나 신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헌신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것만 알고,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삽니다. 이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100 파운드도 들 수 없지만 불도저를 통해 일하면 1000 파운드도 문제없습니다. 나는 10 마일을 달리는 것도 힘들지만 자동차를 통해 달리면 70마일도 문제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일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일하시도록 하며, 내가 그리스도의 힘과 지혜를 그대로 사용하여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능력의 문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얻었습니다.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딛3:6).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엘리사에게 부어주셨던 성령이 저와 여러분에게 부어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도무지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성경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기도하도록 하시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통로요, 문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십니다. [모든 선한 일에서 너희를 완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자신의 눈앞에서 매우 기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히13:21). 하나님은 우리를 빚어나가고 계십니다.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십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전에는 마귀에게 죄의 희생물을 드리던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영적 희생물이란 우리 몸을 말합니다(롬12:1). 구제 헌금을 말합니다(빌4:18). 찬양과 선을 행하는 것, 나누어 주는 것이 영적 희생물입니다(히13:15-16).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신분은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상이 바로 성막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고 나오며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복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이 성막의 문, 양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들입니다.

37절입니다. [시팀나무로 그 현수막을 걸 기둥 다섯 개를 만들어 금으로 입히고 그 갈고리들도 금으로 만들며 또 그 기둥들에 쓰기 위해 밑받침 다섯 개를 놋으로 부어 만들지니라.](37). 기둥 다섯 개에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다섯은 죽음의 수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놋으로 밑받침을 만든 것은 구속을 상징하기 위한 것입니다. 놋은 주님의 저주와 심판을 예표 하는 금속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막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조명을 얻고 문을 통해서 풍성한 꼴을 얻기를 간절히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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