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아론의 옷


말씀: 출애굽기 28:1-8
요절: 출애굽기 28:8

하나님은 성막의 제작 과정에서 제사장 직분을 제정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가족들의 우두머리가 제사장이었고,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임무는 아론의 가족으로 제한되었고, 복음이 실행될 때까지 그렇게 계속되었습니다. 주님은 제사장들이 입을 옷에 대한 규례를 주셨습니다. 옷은 신분과 직위를 나타내며, 백성들과 구분을 두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직위나 자리에서 해고를 할 때 “옷을 벗긴다” 고 말합니다. 경찰 공무원이 그 직업을 그만두며 쓰는 생활 용어는 “옷을 벗었습니다.” 말입니다. 옷을 벗긴다. 옷을 벗었다 들의 관용어는 직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낡은 옷을 벗어 던져 버렸다고 말하면 구습을 타파하고, 옛 습관들을 청산했다는 뜻이 됩니다.

사람이 옷을 입는 이유는 주로 세 가지입니다. 타락 이전에 사람은 아무런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벗었음을 인식하고 그들의 드러남을 가리기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덮기 위해 가죽옷을 제공하셨습니다. 스스로 만들어서 입는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옷을 입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옷을 입는 첫째 이유는 몸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도덕적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합당하게 가리기 원할 것입니다. 벗는 것은 죄요 수치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머리부터 발가락까지 다 가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의복의 첫째 목적은 우리의 벌거벗음을 가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유행은 옷을 입되 무엇인가를 드러내려고 하는데 이는 옷의 목적이 아닙니다. 

두 번째 이유는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외부 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합당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비, 바람, 추위, 뜨거운 열 등으로부터 보호를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일할 때는 노동복을 입어야 하고, 운동할 때는 운동복을 입어야 합니다. 군인은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알맞은 옷을 입지 않는다면 우리의 건강이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셋째 이유는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 옷을 입습니다. 누군가를 끌기 위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옷을 입는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자매들은 좋은 옷, 아름다운 옷에 대한 유혹이 매우 큽니다. 못난 얼굴과 몸매, 천박한 정신을 옷으로 가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사장들에게 옷을 입게 하신 의복은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주로 벌거벗음을 가리거나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입니다. 특히 에봇은 대제사장의 벌거벗음을 가리거나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 하에서 제사장의 직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식구들 즉 레위 지파에게 이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너와 네 아들들은 제단과 휘장 안의 모든 것에 대하여 제사장 직분을 지키라. 내가 너희의 제사장 직분을 너희에게 섬김의 선물로 주었은즉 가까이 오는 낯선 자는 죽일지니라.](민18:7). 제사장 직분은 섬김의 선물입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되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취할 수 있느니라.](히5:4).

제사장이 하는 일은 주로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죄들로 인하여 예물과 희생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취한 대제사장마다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사람들을 위하여 임명을 받나니 이것은 그로 하여금 죄들로 인하여 예물과 희생물을 드리게 하고자 함이라.](히5:1). 아론은 사람들 가운데 임명받은 제사장이기에 백성들의 죄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위해서도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을 따른 제사장이며, 단 한번 영원한 완전한 희생물을 드리심으로써 더 이상의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왕같은 제사장이 된 사람들로서 영적 희생물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그러나 너희는 택함 받은 세대(世代)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보여 주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우리가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찬양과 구제와 감사의 희생물을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둘째, 백성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여야 하리니 이는 제사장이 만군의 [주]의 사자(使者)이기 때문이니라.](말2:7). 제사장들은 성경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제사장이 없으면 하나님을 잊게 됩니다. [이제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참 하나님도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이 지내왔으나](대하15:3). 우리는 영적 제사장으로써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아가 죄인들에게 하나님 두려워하는 법을 가르치고, 주님의 다시 오심과 심판을 가르치고, 거듭남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본성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집을 다스립니다.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계시매](히10:21). 구약에서는 성막과 성전을 다스리는 대제사장이 있었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장차 제사장으로서 천년 왕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습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이들을 다스리는 권능이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로다.](계20:6).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통치자들입니다.

구약에는 두 부류의 제사장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언급된 멜기세덱이란 제사장과 출애굽기에 나오는 아론이란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은 이방인을 위한 대제사장입니다. 아론은 이스라엘을 위한 대제사장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유일한 한 분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은 아론의 계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열에 속한 대제사장입니다.

1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의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네게로 취하여 제사장 직분으로 나를 섬기게 하라.](1). 아론은 레위 지파 계열의 첫 번째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 직분을 세우셨는데 이 직분은 주님이 오셨을 때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경쟁을 통한 공개 채용이 아니라 임명입니다. 제사장 직분은 영적 직분이며, 동시에 공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에 관련된 모든 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양육하고 먹여야 할 막중한 의무가 레위 지파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론은 선택받았습니다(히5:1,4). 아론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히2:17). 이 점에서 우리 주님을 정확히 예표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제사장 직분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론의 계열에 따른 육신적 혈통의 제사장이 아니라 거듭난 영적 제사장들입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이며, 우리는 제사장들입니다. 주님은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3:1). 주님은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대하신 대제사장이 계시니 하늘들 안으로 지나가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라.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굳게 붙들지어다.](히4:14). 제사장은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합니다. [대제사장마다 임명을 받아 예물과 희생물을 드리나니 그러므로 이 사람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함이 마땅하도다.](히8:3).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사장으로서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희생물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몸입니다(롬12:2). 주님은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희생물은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13:5). 이것은 정기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입에 찬양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희생물은 선행과 나누어 주는 구제입니다. 이것들은 주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히13:16). 우리는 아론과 그의 자식들처럼 모두 하나님의 왕국에서 제사장이란 고위 공무원으로 채용된 사람들입니다. 공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드려야 할 희생물은 감사입니다. [감사의 희생물로 희생물을 드리며 기뻐함으로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밝히 보일지어다.](시107:22).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일 뿐 아니라 제사장인 저와 여러분이 드려야 할 희생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의 희생을 드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116:17). 우리는 소를 잡고 양을 잡아서 희생제를 드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리는 감사의 희생을 드리는 제사장들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20).

우리가 드리는 희생물은 기도입니다. [그분께서 그 책을 취하시매 네 짐승과 스물네 장로가 저마다 하프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들을 가지고 어린양 앞에 엎드리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계5:8).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모두 금 대접들에 모아 두십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기도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금 향로를 가지고 와서 제단 앞에 서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 향을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왕좌 앞에 있는 금 제단 위에 드리게 하려 함이더라.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피어난 향의 연기가 천사의 손에서 나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더라.](계8:3-4).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입니다. 많은 사원들이나 마귀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을 보면 향을 피우지 않는 제사가 거의 없습니다. 그 향은 20m도 올라가기 전에 모두 바람에 흩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골방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셋째 하늘에까지 그대로 올라가 금 향로에 담기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오 [주]여, 주께 간청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 헌물들을 받으시고 주의 판단들을 내게 가르치소서.](시119:108)했습니다. 주님께 자원 헌물을 드릴 때 주님은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2절입니다. [너는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의복들을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라.](2). 대제사장이 입는 의복은 거룩한 의복이요,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입니다.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신 분들은 옷이 얼마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지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그런 옷입니다. 레위기 16:4에 보면, [거룩한 아마 속옷을 입고 그 살 위에 아마 반바지를 입으며 아마 허리띠를 띠며 아마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의복이라. 그러므로 그가 물로 몸을 씻고 그것들을 입을 것이며](레16:4)라고 말하는 이는 하얀 옷입니다. 이것은 속죄일에 입었던 옷입니다.

“영화롭고 아름답게”란 말씀은 우리 주님의 재림 때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옷은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람들은 제비 뽑아서 그 옷을 취해 버렸습니다. 주님을 심판하고 정죄하던 당대의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우리에게 어찌 증인이 더 필요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의 말을 들었도다,](마26:65). 그러나 이런 일은 율법에 금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의복, 영화롭고 아름다운 의복을 찢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자기 형제들 중에서 기름부음에 쓰는 기름으로 그 머리에 부음을 받고 거룩히 구분되어 의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자기 머리를 드러내지 말고 또 자기 옷을 찢지 말며](레21:10). 그들은 주님을 죽이면서 자신의 옷을 찢음으로써 더 이상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지 않겠다는 포기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과 같이 더 이상 아론의 계열의 제사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옛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폐기되었습니다.

아론의 의복을 만들 때 주님께서 첫째로 영광을, 둘째로 아름다움을 언급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영광을 고려하고 그 다음에 아름다움을 고려해야 함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의복들을 고를 때 우리는 먼저 아름다움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영광이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옷을 고르는 취향을 모릅니다. 그러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옷을 입을 때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일에 최고의 가치요, 최우선의 고려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질 뿐입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아닌 신약의 제사장들에 대한 의복 규례에서 외적 아름다움은 금지하셨습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한 옷으로 자기를 꾸미되 얌전하게 맑은 정신으로 하고 장식한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하지 말며](딤전2:9). [너희가 단장(丹粧)하는 것은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며 옷을 차려 입는 외적인 단장으로 하지 말고](벧전3:3). 신약의 영적 제사장들의 의복 규례는 구약의 제사장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거룩한 의복, “영화롭고 아름답게” 라는 원칙은 그대로입니다. 이는 우리의 속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3절입니다. [너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 곧 내가 지혜의 영으로 충만하게 한 모든 자에게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론의 의복들을 만들어 그를 거룩히 구분하게 할지니 그리하여야 그가 제사장 직분으로 나를 섬기리라.](3). 옷이 날개란 말이 있듯이 아론의 의복들을 만들어 입힘으로 아론은 거룩히 구별되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섬기는 자에게 벌거숭이로 두시지 않으십니다. 거룩한 옷을 입히십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금은 진주로 장식한 옷,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명품의 옷을 겉에 입히시는 대신 속에 새 사람의 옷을 입히십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이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 /또/ 낮에와 같이 정직하게 행하며 흥청거리거나 술 취하지 말고 침실을 더럽히거나 방탕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자.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2~14). 빛의 갑옷,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육체에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양복을 입고 운동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둠의 일을 하는 것은 어색할 뿐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속옷만 입고 예식에 참석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승복을 입고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옷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하고 싶다면 옷을 벗어야 합니다. 학생이 교복을 입고 술집이나 나이트 클럽에 갈 수는 없습니다. 가려면 갈아 입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은 주님이 주신 옷을 벗어 버리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입거나 그 옷 위에 다른 옷을 걸치든가 했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속 사람은 이미 주님이 주신 옷으로 깨끗하고 단정하게 옷 입혀져 있습니다. [또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이라.](갈3:27). 여러분이 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생활하는데 너무 불편합니까? 처음에 군복을 입은 것만큼 어색하고 불편합니까? 신병들은 거의 다 어색합니다. 그러나 입고 생활하다보면 어느덧 옷이 잘 어울리듯이 그리스도로 옷입고 찬양과 감사와 예배를 드리는 동안 옷이 잘 어울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4절입니다. [그들이 만들 의복들은 이러하니 곧 흉패(胸牌)와 에봇과 겉옷과 수를 놓은 속옷과 관과 허리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의복들을 만들어 아론으로 하여금 제사장 직분으로 나를 섬기게 할지니라.](4). 만들어야 할 옷의 종류입니다. 흉패는 에봇 앞가슴에 달린 일종의 주머니입니다. 길이와 넓이가 각각 한 뼘씩 네모반듯한 모양인데, 이 위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을 부착했으며, 안에는 우림과 둠밈을 넣었습니다(15-30절). 우림과 둠밈은 판결을 위한 것입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제일 겉에 입는 옷으로 가슴 앞과 등 뒤로 연결된 일종의 방탄 조끼 같은 모습입니다. 겉옷은 에봇 밑에 받쳐 입는 옷이므로 일명 '에봇 받침 겉옷'(31절)이라 합니다. 속옷은 '에봇 받침 겉옷'안에 입는 수를 놓은 옷입니다. 관은 대제사장이 머리에 쓰는 것입니다. 허리 띠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봇 위에 매는 것(28절)이고 다른 하나는 반포 속옷 위에 매는 것(39, 40절)입니다. 여기서는 여섯 가지가 언급되어 있는데 총 일곱가지입니다. 반바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제사장의 옷에는 흉패, 에봇, 겉옷, 반바지, 속옷, 관, 허리 띠 이렇게 일곱 가지 항목이 들어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 항목은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6장에는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갑,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과 같이 여섯 개만 나옵니다. 반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성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 마귀를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전신갑주에서 반바지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이 의복들을 거룩한 의복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더러움을 덮음으로, 그들을 거룩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옷의 첫 번째 의미는 덮는 것이요, 다음에는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의복은 겉만 번지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속옷 역시 거룩한 의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속옷은 헤어지고, 더럽고, 다 떨어진 옷인데 겉에만 좋은 옷을 걸치면 눈 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겉보다 속을 더욱 중요시 하십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속옷과 겉옷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덧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니라.] (골3:12~14). 속 옷은 마음에 관련된 것입니다. 거룩, 사랑, 긍휼이 여기는 심정, 친절, 겸손한 마음, 온유함, 오래 참음 이런 것들이 속 옷입니다. 이 위에 사랑을 덧입으면 됩니다. 성도의 행실은 겉 옷입니다. [또 그녀에게 깨끗하고 희고 고운 아마포 /옷/을 차려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는 이 고운 아마포가 성도들의 의(義)이기 때문이라, 하더니](계19:8). 거룩하고 깨끗한 행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있어도 빛이 나지 않습니다.

5-8절입니다. [그들이 금 /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고운 아마 /실/을 취할지니라. 그들이 정교한 솜씨로 금 /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아마 /실/로 에봇을 만들되 에봇의 어깨 조각 두 개를 그 양 끝에 연결하여 그것이 같이 연결되게 할지니라. 에봇 위에 있는 정교한 허리띠는 에봇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에봇과 하나로 만들되 금 /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아마 /실/로 만들지니라.](5-8). 대제사장이 입을 옷의 재료들입니다. 옷의 재료들이 성막의 앙장(26:1), 휘장(26:31,36) 쓴 것과 동일한데 금실이 하나 더 추가 되어 있습니다. 모두 주님의 사역과 신성을 예표하는 색들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금색은 영광과 존귀를 뜻하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왕권을 상징합니다. 청색은 하늘을 상징합니다.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 온다는 의미입니다. 자주색은 권위와 위엄, 홍색은 희생과 속죄 그리고 고운 아마실은 순결과 순수를 각기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은 죄가 없는 순수한 분이십니다. 이들 각 색깔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에봇에 대해서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에봇은 연결하다란 뜻입니다. 방탄 조끼처럼 가슴 앞과 등 뒤로 연결된 옷입니다. 에봇은 소매 부분이 없는 긴 조끼 모양으로 생겼는데, 에봇 제조에는 금색, 청색, 자색, 홍색, 흰색 등 다섯 가지 색상의 실이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구약의 각종 제사 제도와 성막 등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듯, 제사장 역시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히5:5, 6)를 예표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제사장이 입는 의복도 그에 준하는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는데,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각종 실로 '정교하게'(26:1) 만든 에봇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마3:17;17:5)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봇은 대제사장만이 입는 옷은 아닙니다. 왕으로서 다윗 역시 에봇을 입었습니다. [주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추니 그때에 다윗이 아마 에봇을 입었더라.](삼하6:14). 사무엘 역시 에봇을 입었습니다. 사무엘은 대제사장이 아니라 대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아이였을 때에 아마 에봇을 입고 주 앞에서 섬겼더라.](삼상2:18). 이는 우리 주님께서 왕과 대언자와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지신 분이심을 완벽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봇은 어깨 조각 양 끝에 매어 달아 묶습니다. 어깨 조각이란 것은 가슴과 등 쪽으로 나뉘어진 에봇을 하나로 연결하는 일종의 멜빵입니다. 제사장의 목을 중심으로 하여 에봇을 좌우 양쪽으로 고정하기 위하여서는 어깨 조각(견대) 두 개가 필요했습니다.

에봇의 영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에봇으로 예표되는 우리 주님은 붙들어 매는 능력과 죄는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은 만유를 붙드시고 계시며, 믿는 성도들을 견고히 붙드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붙잡으시고 묶으시며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 붙들어 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 연결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로 연합하십니다. 에봇은 두 개의 어깨 조각과 흉패 를 붙들어 맵니다. 이러한 판들이 에봇에 고정되어 있었으므로 그것들은 또한 대제사장에게 고정되고 묶이고 죄어져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므로 그것들은 그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었습니다. 에봇의 의미는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고정하는 능력과 매는 힘과 묶는 역량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능력과 힘이나 역량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넘어질지라도 완전히 쓰러지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자신의 손으로 그를 붙드시기 때문이로다.](시37:24). 여러분이 넘어지는 순간 무엇인가를 붙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순간 내가 아닌 다른 누가 나를 붙들어 주면 매우 고맙고 감사합니다.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시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나로 말하건대 주께서 나의 순전함 가운데서 나를 붙드시고 영원히 주의 얼굴 앞에 세우시나이다.](시41:12). 주님은 항상 우리를 붙드십니다. 흔들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붙들어 매십니다. [네 짐을 [주]께 던져서 맡기라. 그분께서 항상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의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평안과 기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요동치는 물결처럼 흔들리지 않으려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내 혼이 주를 친밀히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63:8). 주님께 밀착하십시오. 친밀히 따를 때 나를 붙드시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어디서나 우리와 떨어지지 않습니다. 에봇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침의 날개들을 취하여 바다 맨 끝 지역들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9-10). 사막이나 광야 한 가운데 거할지라도 주님은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옛날 태평양을 횡단하던 중 배가 파선되어 20일 이상 뗏목을 타고 표류하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리건 베이커라는 선장과 젊은 두 선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뗏목을 타고 20일 동안 바다 한가운데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으로 온 몸이 타는 것 같고, 목이 말랐으며 밤에는 너무나 추워 얼어 죽을 것 같은데다 상어 떼의 습격을 받아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절대적인 적막과 고독 가운데 20일 동안 바다에 표류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선장은 신앙이 좋아서 늘 시편 23편을 외웠습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분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참으로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들의 눈앞에서 내 앞에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1-6). 이 구절은 미국의 주일 학교를 다니는 초등학생 정도면 다 외우는 성경구절입니다. 선장은 이 말씀을 암송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결국 23일 만에 구조되었는데, 그 때 신문기자들은 “어떻게 인간의 한계선을 뛰어 넘어 23일 동안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선장은 “나는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대로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이겨나갈 수 있었고, 결국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바다 한 가운데 표류하는 자신의 종들을 붙드시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주님의 손을 뿌리쳐 버리고 망한 뒤에 주님께 한탄하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주님께 붙잡히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을 싫어해서 제 멋대로 살고자 떠나버리지 않으십니까? 구원받은 성도는 모두 에봇처럼 단단히 주님께 메여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구원받은 이후로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그들이 마음 속에서부터 주님께 붙들린 삶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나와 주님과의 관계성을 확인하고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미국에서 인기 정상을 누렸던 가수 중 케이트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가수가 '하나님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녀만큼 이 노래를 잘 소화할 수 없을 것이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신문 기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스미스양, 당신은 언제 봐도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생활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까?" 스미스는 어릴 때부터 다음과 같은 자세로 살아왔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신앙을 갖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미스는 어느 날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노를 젓는 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 놀고 있었는데 놀이에 너무 열중하다보니 썰물이 밀려 나가면서 보트가 육지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아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지만 도저히 강한 썰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어서 해변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스미스는 두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성경 말씀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래서 배에 탄 친구들과 함께 배 밑창에 머리를 대고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몇 시간이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얼마 후 멀리서 불빛 하나가 점점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목이 터지도록 살려달라고 외쳤고 결국 그 배에 의해서 구조되어 무사히 육지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스미스 자매는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낙심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게 되었고 어떤 어려운 처지에 이른다고 해도 초조해 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확신에 차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말씀을 통해 이런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곳의 많은 성도들이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믿고 순종해서 살면 절대 살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small business를 하는 사람이 세금 다 내고 하면 망하지요. 세금 다 내면 장사 할 수 없습니다.”라고 태연스럽게 말합니다. 그것은 대체 어느 성경 몇장 몇 절에 나오는 말씀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크고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교회 집회 다 참석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면 사업도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없는 강한 자기 확신으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뒤 엎어 버리며 사는 성도들이 왜 이리도 많습니까? 저의 선배 목자는 국비 유학생으로 이곳 서부에 와서 조교를 하면서 박사 과정을 하면서 매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Chicago로 갔습니다. Chicago에서 자기가 존경하는 목자로부터 성경을 배우고, 1:1 제자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곳 미국에서 학위를 받는 동안 단 한 번도 시카고 주일 예배를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담당 교수가 불러서 주일 예배를 빠지든지 나의 조교를 그만두고 지도 교수를 바꾸든지 하라고 말했습니다. 국비 유학을 받았기 때문에 정규 학기 내에 학위를 받아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국가에 7년간 교수로 복무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붙드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분이 박사 학위 논문을 발표했을 때 자신을 쫓아내려던 담당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계속 남아서 자신과 같이 연구하자고 사정을 했습니다.

남들은 일요일 하루 예배 시간 빠지는 것만으로도 학교 시험이 어쩌고 하는 사이 그분은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을 날려 가며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했던 것입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공부했습니다. 그분은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이후로 그분이 속했던 선교 센터에서는 교수 목자, 의사 목자, 법조계 등 소위 말하는 엘리트 목자들이 줄을 이어 나왔습니다. 선교하고 일하며 공부하는 1인 3역의 일에 다 승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강한 자기 확신 속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믿었을 때 현실로 결과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면 승리하고 내가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면 승리하는 것이지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자기 계획과 능력을 의지한다고 해서 모두 망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차라리 모두 망해 버리면 다시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겠지만 주님은 그냥 버려두십니다. 시간 관리 잘하고 피땀 흘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배 빠지고 기도 안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시험 성적이 안 나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면 잘 나옵니다. 예배 빠지고 돈 벌어서 집 사고 차를 사는 사람은 수두룩합니다. 그러나 그런 승리는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믿음의 삶도 아니며, 육신의 자랑 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간증이 아니라 자기 자랑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생각 속에서부터 의식의 전환, 사고의 발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바 된 삶을 살며 전적으로 주님의 지혜와 능력과 계획을 믿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일부는 주님과 적당히 손잡고 갈 것인가? 하나님은 여러분을 붙드시고 계시며, 전적으로 주님께 의탁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다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순수하신 분이시라 무엇인가 섞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100%가 아니면 0입니다.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온전히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게 하십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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