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생명의 빵-

말씀: 요 6:30-43 요절: 요 6:

사람의 몸은 흙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흙에서 난 것을 양식으로 삼습니다. 그것이 밥이든 빵이든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몸은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삽니다. 반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 넣으신 것이기에 땅에서 난 것으로 양식을 삼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거듭난 영은 말씀의 씨앗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적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땅에서 난 채소, 과일 등은 우리의 몸에 훌륭한 양식이 될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에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 하거니와 하나님께서는 이것과 저것을 다 멸하시리라.](고전6:13a). [그러나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이는 우리가 먹어도 더 낫지 아니하고 먹지 않아도 더 못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니라.](고전8:8).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썩을 양식이 아닌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하는 항상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말씀을 듣던 무리들은 주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30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이사 우리로 하여금 보고 선생님의 말을 믿게 하시겠나이까? 선생님이 행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30).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란 말씀에 대해 이들은 무엇으로 선생님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여 주어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보여준 표적을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지금 주님을 찾아 나선 이들 역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 이상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이 일이 오래된 옛날의 일도 아닙니다. 바로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합니다. 표적은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그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에서 어떤 자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선생님으로부터 표적을 보기 원하나이다, 하거늘](마12:38). 누구나 다 표적으로 보고 싶어 합니다. 표적을 보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끊임없이 표적을 구했습니다.

표적은 누가 구합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라.](마12:39). 왜 표적을 구합니까?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더러는 그분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눅11:16). 표적을 보면 사람들은 놀랄 뿐이지 믿지 않습니다. 보리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4000명을 먹인 사건 이후에도 사람들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그분과 논쟁을 시작하며 그분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그분께서 영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가?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막8:11-12). 방금 표적을 본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보여 주신 표적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싶은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 집에 병든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의 병이 낫는 표적을 보고 싶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움 받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대치가 있고, 소원이 있지만 모두 다릅니다. 사람마다 요구하는 표적을 다 주려면 끝이 없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기록된바, 그가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 조상들은 사막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하매](31). 사람들이 하는 이 말은 어젯 밤 자신들이 먹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 모세는 200만이 넘는 사람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먹였는데 당신이 기껏 5,000명을 먹인 사건을 가지고 뭘 그러느냐? 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약의 사건을 알 뿐 아니라 “기록된바”라며 성경을 인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이 인용한 구절은 느헤미야 9:15입니다. [그들의 굶주림으로 인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며 그들의 목마름으로 인하여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느9:15a). 그러나 백성들은 성경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주어 먹게 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것은 [주]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빵이라, 하니라.](출16:15b). 모세는 주님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빵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모세가 빵을 준 것이 아닙니다. 오병이어 사건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은 직접 빵을 주신 분이십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준 것이 아니니라. 오직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빵을 주시나니](32). 예수님 역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모세가 준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모세가 준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사람들이 한 일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모세가 준 것이라고 해도 만나는 참 빵이 아닙니다. 만나는 육신의 양식이었지 영의 양식이 아닙니다. 만나 역시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썩어 없어지는 양식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려온 것은 주님이 주실 참 빵 즉 영생하도록 항상 있는 생명의 빵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믿는 자들에게 만나가 아니라 참 빵을 주십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육신적인 빵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은 생명의 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밀이나 보리 빵이 아닙니다. 쌀로 만든 빵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신 생명의 빵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주시는 참 빵입니다. 이 빵을 먹지 않으면 아무도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빵은 광야에서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럼 이 빵은 어디에 있으며, 그 정체가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참 빵이 무엇인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3절입니다. [이는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자 곧 그가 하나님의 빵이기 때문이라.](33). 주님은 자신이 하늘부터 내려 오셨고, 생명을 주시는 자시오, 하나님의 빵이란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땅에서 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나셨습니다. [첫 사람은 흙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고전15:47).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살려 주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빵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빵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빵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은 일시적인 육신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요10:28).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능을 주셨사오니 이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요17:2).

하나님의 빵은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입니다. 하나님의 빵은 something이 아니라 someone입니다. 33절을 유념해서 보십시오. 하나님의 빵은 it이 아니라 he입니다.

34절입니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이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하매](34). 무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빵에 대해서 말씀하시자마자 “주여, 이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주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빵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무리들이 이해하는 빵은 만나와 같은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그냥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그런 빵을 기대했습니다. 육신의 배를 채워줄 빵을 생각합니다. 이런 빵을 항상 달라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듯이 그렇게 양식을 먹었으면 하는 소원을 말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와 생명을 주는 자 곧 그가 하나님의 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빵을 만들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곧 하나님의 빵이란 것입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빵과 주님이 말씀하시는 빵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어서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주여, 이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란 무리들의 요구는 놀고먹자는 이야기입니다. 매월 평생 동안 넉넉히 복지 연금이나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의미를 왜곡하여 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웁니다. 성경의 어떤 해석도 사적인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이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고전2:13).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생명의 빵이신 자신을 증거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위장을 채워 줄 빵으로 이해했습니다.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했을 때,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하매](요3:4)라고 했습니다. 그는 영적인 태어남에 대해서 몰랐던 지라 육신이 한번 더 태어나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습니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물, 목마르지 않는 영적인 물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땅에서 솟아나는 우물 물로 이해했습니다.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로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 이 여자 역시 영적인 생명, 영이 마셔야 할 물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이들 역시 육신이 먹을 빵과 영이 먹어야 할 빵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거듭난 영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육신만 먹고 마시면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신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육신이 전부가 아닙니다. 육신에 물이 필요하듯 영적 음료인 성령이 필요하고, 육신에 빵이 필요하듯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3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주님은 이제 직접적으로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굶주림과 갈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나를 먹는 자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가 아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입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 방법은 주님께 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 오면 주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게로 와서 먹으라.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내게로 와서 쉬어라(마11:28)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4), [그 명절의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생명의 빵, 생명의 물, 평안한 쉼은 와서 뜯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얻을 수 있는 자격은 한 가지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주님께 와야 합니다. 주님이 집단적으로 주시지 않습니다. 개개인이 모두 직접 주님께 나아 와야 합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나를 믿는 자는” 동격입니다.

이제 인류의 식량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 인류는 먹는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문제는 땅에서는 영적인 양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땀을 흘려도 육신의 양식만 얻을 수 있을 뿐 영혼의 주림과 갈함은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요,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떠돌아다니며 [주]의 말씀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달음질하여도 그것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氣盡)하리라.](암8:11~13). 영적 빈곤과 갈증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철학자가 되고 구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허무를 느낍니다. 인생을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로 나오면 영적 굶주림과 목마름이 해결됩니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육신적인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도 말고 구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온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1~33). 이곳에는 Small business를 하는 한인들이 매우 많습니다. 작은 사업체에 취직한 사람들 역시 많습니다. 월급이 제 때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먹을 것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어떻게 노동해야 하는가? 노동의 목적과 가치를 분명히 배웠습니다. 썩을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않는 항상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십시오.

36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도 나를 보고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36). 주님은 이들의 불신을 책망하셨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데,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영적 양식이 아니라 육신적 양식,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먹을 빵을 간절히 원했고, 그것을 평생토록 항상 주실 것을 구했지만 생명의 빵을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결코 주리지 않을 생명의 빵을 먹으러 나아오지 않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주림도 없고, 갈함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된 사람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5:3,6).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복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37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이 구절은 흔히 구원 예정론자들이 써 먹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주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영원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말합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아버지께서 주님께 주신 자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이 예정했기 때문에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정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정된 자들이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주님은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받아 들이십니다. 주님을 믿기만 하면 주님은 아들로 영접하십니다. 누구든지 상관없습니다.

38절입니다. [이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왔음이니라.](38). 주님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이유, 목적을 설명하시면서 거듭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 왔음’을 강조하십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분만이 주님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닙니다. 사생아가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내려 온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 믿는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모든 사람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이것이니라.](39).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자는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라.](4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셋째,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주님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았고, 그 뜻대로 행했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죽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셨으니](갈1:4).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고민하고 기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7).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입증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12:2).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미 여러 차례 설교했지만 이 시간 간단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도 너와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단 말이냐?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한 것이냐?](마20:14-15). 하나님은 무엇이나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할 때 악한 사람들은 부당하다, 불공평하다, 부정이다 하며 따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난단 말이냐?]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사람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4). 하나님의 눈에서 볼 때 하찮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의 눈에는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러야 할 사람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뜻-will/하시느니라.](딤전2:4).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셋째, 구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대로 하였을 뿐 아니라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5). 먼저 자신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헌신입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물입니다. 다음에 구제를 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히13:16).

넷째,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음행을 멀리하고](살전4:3).

다섯째,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여섯째,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고 자유를 악을 가리는 도구로 쓰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너희는 {주}를 위하여 사람의 모든 규례에 복종하되 왕에게는 최고 권위자에게 하듯 하고 총독들에게는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께서 보내신 자들에게 하듯 하라. 그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이것은 너희가 잘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말/을 잠잠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에게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를 악을 가리는 도구로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들로서 행하라.] (벧전2:13~16).

일곱째,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너희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자기 혼을 하나님 곧 신실하신 창조{주}께 맡겨 지키시게 할지어다.](벧전4:19).

여덟째, 육체의 남은 때를 정욕대로 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즉 그는 자기 육체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리라.](벧전4:2).

아홉째,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네가 온 바빌론 지방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금은과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계신 자기들의 하나님의 집을 위해 자원하여 드리는 자원 헌물을 가져다가 그 돈으로 수소와 숫양과 어린양과 그 음식 헌물과 그 음료 헌물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에 계신 네 하나님의 집 제단 위에 드리고 그 나머지 금은은 무엇이든지 너와 네 형제들이 선히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대로 쓸 것이며 또 네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네게 준 기구들은 예루살렘의 하나님 앞에 드리고] (스7:16~19). 우리가 얻은 모든 재물은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데 쓰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써야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은 명시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명시적인 뜻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4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그분에 대해 수군거리며 이르되,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 하니](41-42).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빵이란 사실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요즘 같으면 “네가 외계인이냐?” 스타워즈를 타고 왔느냐? 어디에서 왔느냐?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인들의 정신은 온통 외계에 쏠려 있습니다. 외계에서 올 외계인들은 지구보다 수십배의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으며, 초능력을 비롯한 몇 백배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흔히 묘사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이 명령이 네게 숨겨진 것도 아니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 이것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건너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니라.] (신30:11~13).

주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분명히 아는 것은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좋지만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은 싫었습니다.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라고 말한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솔직히 어떤 사람도 그의 부모를 다 아는데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사실을 쉽게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데는 두 가지 큰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나다나엘조차 메시야를 만났다는 빌립의 말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그에게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대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으니 곧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님이시니라, 하매 나다나엘이 그에게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니 빌립이 그에게 이르되, 와 보라, 하니라.](요1:45-46). 구약에 따르면 메시야는 베들레헴(믹5:2)에서 태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사렛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문제는 두고 두고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당대의 백성들, 바리새인들에게도 이 문제는 심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중의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이분은 진실로 그 대언자시로다, 하매 다른 이들은, 이분이 그리스도시다, 하되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이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씨에서 나오며 또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 마을에서 나오시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요7:40~42). 예수님을 변호하던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이 한마디에 기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조사해 보라. 이는 갈릴리에서는 대언자가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요7:52). 조금만 더 조사해 보았으면 될 문제를 이들은 나사렛 사람, 갈릴리 출신으로 매도해 버린 것입니다. *참고: 나사렛은 갈릴리의 도시이름이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나사렛이라 하는 갈릴리의 도시로 가서(눅1:26). 예수님의 출생지를 몰랐던 타 지역 사람들도 예수님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더라.](요7:27). 그들은 알려면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마리아나 그 동네 사람들에게 한번만 물어봐도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데 걸렸던 두 번째 걸림돌은 요셉과 모친 마리아입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 있는 일들이 어디에서 났느냐?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그의 동생들은 야고보와 요세와 시몬과 유다라 하지 아니하냐? 그의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났느냐? 하고 그분으로 인해 실족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대언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13:54-57). 사람들은 이 문제로 인해 예수님이 메시야란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를 아는데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 문제 역시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처녀 탄생할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사7:14). 구약의 예언을 통해 동정녀를 통해 메시야가 탄생할 것임을 누구나 다 알았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출연으로 이미 그 출생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늘의 별은 누구에게나 다 보였습니다. 이 별이 이스라엘의 왕의 탄생을 나타내는 별이란 사실도 다 알려졌습니다. 헤롯은 이 일로 어린 애들을 대규모 학살한 일도 있습니다. 마리아나 요셉에게 물어 보아도 될 문제입니다. 그들이 존경하던 대언자 침례인 요한은 이미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항상 요셉과 마리아를 물고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사생아로 몰아 부쳤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는 음행을 통해 나지 아니하였고 우리에게는 한 아버지가 계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요8:41). 예수님의 정녀 탄생을 믿지 못했던 이들은 마리아가 음행을 통해 나았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공생애 기간동안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니 참으로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분을 더 이상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5:16). 이것이 핵심입니다. 육신을 따라 알면 주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셋째, 전통과 율법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며, 율법을 어기면서 기적을 베풀고 선을 행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메시야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이르되, 그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다른 이들은 이르되,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기적들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가운데 분열이 생겼더니] (요9:16).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안식일에 일을 하는 사람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는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정한 전통과 율법주의는 성경 해석과 교리의 왜곡을 낳았고, 그로 인해 주님은 메시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죽는다는 말씀이 믿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생명을 다시 얻으려고 내 생명을 버리기 때문이라. 이 생명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요,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내게는 생명을 버릴 권능도 있고 다시 취할 권능도 있으니 이 명령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인하여 유대인들 가운데 다시 분열이 생기니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르되, 그가 마귀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의 말을 듣느냐? 하고] (요10:17~20). 십자가의 선포는 듣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을 떠나게 만든 것도 십자가요, 베드로를 실족하게 한 것도 십자가요, 유대인들에게 마귀 들렸다는 말을 들은 것도 십자가의 선포입니다. 주님을 죽이는 자는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주님을 죽이게 될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느냐? 하시니 사람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마귀가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느냐? 하매] (요7:19~20).

오늘날 유대인들에게도 가장 큰 걸림돌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메시야가 죽는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유대인들을 향해 계속 선포했던 말씀이 십자가와 부활이었던 점을 볼 때 우리는 십자가 문제가 이들에게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었는지 쉽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43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43). 주님은 자신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지금까지 증거했는데 이들이 지금 “요셉의 아들이 어찌...”하며 수군거리니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행한 기적은 자신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아들’이라고 단언하는 데는 별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데는 어떤 사실의 증거도 도움이 되지 않고 변명이 될 뿐입니다. 수군거림은 죄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수군거림입니다. [/그들은 곧/ 온갖 불의와 음행과 사악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하며 시기와 살인과 논쟁과 속임수와 적개심으로 가득하고 수군수군하는 자요,](롬1:29). 사도 바울이 묘사한 이 모습이 예수님을 찾아온 유대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육신적인 교회의 모습 역시 동일합니다. [이는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던 모습으로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치 않는 모습으로 보일까 염려하며 또 논쟁과 시기와 분노와 다툼과 헐뜯음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소동이 있을까 염려하고](고후12:20).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볼 때 마다 수군거렸습니다.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면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수군거렸고(눅15:2), 삭개오의 집에 들어갈 때는 온 무리들이 예외없이 수군거렸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하더라.](눅19:7). 명절에는 온 유대인들의 대화의 소재가 되었던 이슈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에 대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수군거림이 많으니 이는 어떤 이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이들은, 아니라. 그가 사람들을 속인다, 하였음이라.](요7:12). 수군거림은 육신의 죄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아는 것은 오병이어를 먹어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 위를 걸어 보았거나, 그의 못자국난 손가락이나 옆구리를 만져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표적을 보지 못했지만 주님을 믿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보지 못하나 그분을 믿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니] (벧전1: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요20:29). 우리는 말씀 앞에 항상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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