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말씀: 요 5:30-43
요절: 요 5:30

주님은 5장에서만 두 번 반복하신 자신에 대한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주님은 자신을 자랑할 수 있고, 자신의 능력과 위엄과 영광을 뽐낼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직접 보는 것, 들은 것 외에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아가 없으신 분 같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 독립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아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철저히 자아를 부인하는 자아 부인(self-denial)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진 한 가지 의지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의지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기 전에 하신 기도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주님은 자신의 의지를 오직 한 곳에만 집중했는데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유일한 자기 의지였습니다. 주님은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무능력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삶이요, 존재 의미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 자신의 사상, 자신의 교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철저히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말씀만을 가르치고,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했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기 말을 했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모든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바와 같이)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였노라, 하시느니라.](히10:7). 주님은 친히 삶의 본을 보이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구하도록 가르치쳤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실 때,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하게 했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이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라, 하시더라.](마12:50)고 하셨습니다. 현대의 심리학자들, 철학자들, 교육자들과는 달리 자아를 추구하라. 자신의 이상을 향해 꿈을 가져라와 같은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뜻을 이루어주소서”라고 기도한 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셨으니](갈1:4). 주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 가운데 아버지의 뜻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별도로 자신의 뜻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 아버지의 소원이 아니라 자기 소원,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 아버지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구하는데 전력(全力)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기’란 부인되어야 하며, 낮추어져야 하며(롬12:16),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key word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아무도 자기 것을 구하지 말고 각각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구하라.](고전10:24), [나와 같이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3)고 했습니다. 자기 육신을 위하여 심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육신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갈6:8a). 자아는 미워해야 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로되 누구든지 나와 복음으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구원할 것임이라.](막8:35,눅9:24),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보전하리라.](요12:25).

주님은 제자의 요건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제자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머리나 능력이나 힘이나 돈이 아닙니다. 학문이나 혈통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제일 조건입니다.

왕국에서 가장 큰 자는 누구입니까? 많은 일을 한 사람, 인류의 평화와 복지에 공헌한 사람? 에디슨처럼 발명을 많이 하거나 알렉산더처럼 땅을 많이 정복한 사람? 슈바이쩌나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해 산 사람? 누구입니까? 가장 큰 사람은 남과 상관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마18:4).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높아지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크게 되는 방법 역시 간단합니다. 땀과 피를 흘려서 될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면 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는 진리를 마음 속으로 깊이 영접하고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낮은 자는 마귀입니다. 왜 마귀는 낮아졌습니까? 자기를 가장 높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네가 네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서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 (사14:13~14). 주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반면 마귀는 나는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엄숙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15:5). "나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현재 상황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의 믿지 않는 것같이 “나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도 거의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다음 말씀도 실제요, 진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만일 믿을 수 있거든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시니](막9:23).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마귀는 자아를 부추겨서 하나님 없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망상을 심어 줍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말은 저주의 문구입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윌리엄 로는 말하기를 “온전한 자기 포기는 그리스도인의 품성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덕성들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라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으며, 주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통해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고 절대적인 의존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무능력한 자의 인생 넋두리가 아니라 내 안에서 뜻을 두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가장 적극적인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포도 나무에 붙은 가지인 것을 명심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는 대로 일하는 성도가 될 때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31절입니다. [내가 만일 내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니라.](31). 자기가 자신에 대해 증거하면 그것은 증거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점을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네가 너에 대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하매](요8:13). 증인은 두, 세명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가 듣지 아니하거든 너와 함께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마18:16). 이것은 인간사 문제에서도 동일한 것이요, 교회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제 세번째 너희에게 가려 하노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하리라.](고후13:1),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 앞에서가 아니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5:19).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 자도 두세 증인의 증거로 죽임을 당했습니다(히10:28). 하지만 주님은 자신에 대해서 자기 증거뿐만 아니라 여러 증인이 있습니다.

32절입니다. [나에 대하여 증거하시는 다른 이가 있으니 그분께서 나에 대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된 줄을 내가 아노라.](32). 첫째, 침례인 요한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33). 사람들이 요한의 증거를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여러 차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요1:34),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오(요1:29), 성령과 불로 침례를 베푸실 분이시오(눅3:16), [내가 보고 이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1:34)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나온 증거는 받아들이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34). 주님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주님을 제대로 증거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아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피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증거를 하게 하신 것은 이것을 통해 믿고 구원을 받게 하려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더 잘 믿는 경향이 있는지라 하나님은 먼저 요한을 보내신 것입니다.

둘째, 요한보다 더 큰 증거는 주님이 행하신 일들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끝마치게 하시는 일들 곧 내가 행하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해 증거하기 때문이요,](36). 주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지라도 그 일들은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들은 믿으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고 믿게 되리라, 하시니라.](요10:38).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 그렇게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그 일들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셋째, 성경이 주님을 증거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증거입니다. [성경을 탐구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요5:39). 성경은 주님이 누구이신지, 무슨 일을 할지 미리 다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주님이 누구신지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35절입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나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동안 그의 빛을 기뻐하기 원하였느니라.](35). 요한은 타오르며 빛나는 빛(light)이었습니다. “타오르며 빛나는 빛(등불)”이란 희미하게 가물거리는 빛이 아니고 이글이글 타오르며 빛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고, 열은 있지만 빛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안에 받은 진리를 활활 타오르게 하지 못하면 열과 빛은 희미한 정도 밖에 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두 요한과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세운 도시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4).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걸으라.](엡5:8).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밖으로 환히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빛입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그의 빛을 기뻐했습니다. 물론 잠시 뿐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가 돋으면 타서 시들어 버립니다. [해가 돋은 뒤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시들어 버렸고](마13:6), 이들은 잠시만 견디다가 스러지고 맙니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만 견디는 자니 이는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그가 곧 실족하기 때문이라.](마13:21). 빛에 잠시 거하면서 기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뿌리가 확고히 내리지 않으면 모두 실족할 것입니다. 교회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몰려 든다고 좋아하는 것은 잠시입니다. 모두 제자 양육을 시켜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 안에 깊이 뿌리 내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설교가 너무 좋습니다.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라고 입술 발린 소리를 하지만 금방 실족하고, 곧 배교해 버립니다. 실족은 믿는 신자에게 오는 현상이요, 배교 역시 그렇습니다. [바위 위에 있는 자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시만 믿다가 시험의 때에 배교하는 자들이요,](눅8:13). 제가 성도들에게 계속 성경을 읽고 또 읽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튼튼하고도 깊은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지와 잎사귀에 매달리지 말고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한 거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속에 거하게 하옵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엡3:17).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골2:7). 꾸준히 말씀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36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끝마치게 하시는 일들 곧 내가 행하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해 증거하기 때문이요,](36). 주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 누구나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하는 짓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너무나 많아서 사람들은 이 분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정말 메시야가 와도 이보다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을까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일로 자신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에 대하여 증거하거늘](요10:25). 병자를 고치는 일은 물론이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선포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일들은 보고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침례인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냈을 때 주님은 자신이 한 일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눈먼 자가 시력을 받으며 다리 저는 자가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며 귀먹은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일어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5-6). 이 말씀은 이사야 35:5-6절의 말씀이 실현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고, 주님이 행하시는 일은 성경에 기록된 일이요, 주님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메시야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37절입니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 대하여 증거하셨기 때문이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으며](37). 주님은 점점 더 큰 증거를 내 세우십니다. 침례인 요한, 자신이 한 일, 다음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증거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늘에서 친히 음성을 주님을 증거하셨습니다. 침례를 받고 올라 오실 때 아버지께서 증거하셨습니다. [또,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마3:17). 변화 산상에서도 주님은 증거하셨습니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또, 보라, 그 구름 속에서 나오는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매우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매](마17:5).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도 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 다시 영화롭게 하리라, 하시니라.] (요12:28).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 차례나 하늘에서 음성을 직접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37절에 주님은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들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천둥이 쳤다, 천사가 말했다(요12:29)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들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듣지 못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것은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경우를 말합니다. 분명히 보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을 때 우리는 잊어버리게 되고, 무심코 넘어 가 버리게 되는데 그 때는 보았지만 보지 못한 것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분명히 하늘에서 음성이 나는 것을 들었지만 듣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38절입니다.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38). 왜 음성을 들었지만 듣지 못한 것입니까? 그 안에 주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믿을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은 세미한 주님의 음성도 크게 들리고, 말씀이 없는 사람은 고막이 터지는 큰 소리에도 단지 소음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르시되, 앞으로 나아가 [주]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보라, [주]께서 지나가시는데 [주] 앞에서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주]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주]께서 계시지 아니하고 또 지진이 있은 뒤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주]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이 있은 뒤에 고요한 작은 소리가 있으므로](왕상19:11-12).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지진이 있어도 그 가운데 주님께서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불 가운데도 주님은 계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욥의 친구 소만 사람 엘리바스 역시 비슷한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영이 가만히 서 있었으되 나는 그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였거니와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때에 내가 조용한 가운데 한 음성을 들었으니 이르기를,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더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자기를 만드신 이보다 더 깨끗하겠느냐?] (욥4:16~17). 사무엘 역시 어린 시절에 고요하고 작은 음성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많이 거하게 하지 않으면 주님이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셔도 여러분은 제대로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명령합니다. [성경을 탐구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39). 성경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금은보화를 찾듯이 찾아야 합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고 감추어진 보배들을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그때에 [주] 두려워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아는 것을 발견하리니] (잠2:4~5)고 합니다. 성경 속에서 진리를 찾는 일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저는 하루에 30페이지씩 성경 읽기를 매우 강조합니다. 매일 빠지지 않고 이 정도의 양을 읽는 것은 매일 일정량의 식사를 하는 것이나 일정한 시간 잠을 자는 것이나 일을 하는 것과 똑 같이 해야 할 일입니다. 신문이나 T.V를 보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한 시간입니다. 창세기 1:1부터 요한계시록 22:21절까지 주님의 나팔 소리가 내 귓전을 울릴 그 날까지 계속 읽어 보십시오.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어 보십시오. 성경이 여러분에게 주는 유익을 확연하게 알 수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 채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자주 보는데, 이는 크리스찬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지 믿음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를 찾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행복하나니 이는 지혜를 사고 파는 것이 은을 사고 파는 것보다 나으며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잠3:13~14). 이것이 성경을 찾아서 읽는 자들의 행복입니다. 성경 안에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을 읽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읽어야 합니다. 묵상해야 합니다.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라를 보십시오. [에스라가 자기 마음을 예비하여 [주]의 율법을 연구하고 행하며 이스라엘에서 법규와 법도를 가르치려 하였더라.](스7:10). 이것이 제사장의 본분이요, 특권입니다. 여러분은 제사장 에스라와 같이 자기 마음을 예비하여 주의 율법을 연구하고, 행하며, 가르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행하기 위해서 연구합니다. 행한 후에는 그 내용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그는 제사장이 되지 못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호4:6). 주님은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입술에 지식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여야 하리니 이는 제사장이 만군의 [주]의 사자(使者)이기 때문이니라.](말2:7). 우리는 성경을 꾸준히 찾아 보고, 읽고, 암송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의로운 자의 마음은 대답을 얻으려고 연구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입은 악한 것들을 쏟아내느니라.](잠15:28). 어릴 때부터 성경을 탐구했던 디모데를 본받아 우리는 모두 성경을 탐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아는 것이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것이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40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40). 성경을 탐구하지 않는 자들의 결과가 이것입니다. 주님은 “내게로 오라”고 초청의 음성을 발하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결코 적게 읽은 사람들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탐구만 한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딤후3:7)에 해당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읽는 성경은 성경 연구가 아닙니다. 많은 신학교 교수들이 성경을 가르치지만 정작 성경에 대해 한 줄도 제대로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대해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자주 봅니다. 진리의 성경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시켜 놓을 때 진리는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41절입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아니하노라.](41). 주님은 사람들의 인기를 구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행한 말이나 일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주님은 오직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영광만을 추구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부담을 줄 수도 있었지만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사람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살전3:6).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일은 정치인들이 인기 연예인들이 할 짓이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수치와 멸치, 천대와 모욕을 받기기 일쑤입니다. 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했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구제(救濟)하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보상(報償)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사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순수함은 오염되기 시작하고, 진리는 부패되기 시작합니다.

42절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희 속에 없음을 내가 아노라.](42). 주님께 나오지 않고, 말씀이 거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종교적으로 열심일지 몰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속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말씀이 풍성이 거하게 해야 하고, 사랑이 쏟아 부어져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들의 언어와 천사들의 언어로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대언하는 은사가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며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를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1~3). “사랑이 없으면...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게 아무 유익도 없느니라.” 사랑과 나의 관계입니다.

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까?

첫째,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우리 마음은 두 가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두 종류의 사랑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굳게 붙들고 저 주인을 업신여길 것임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 마찬가지로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마음 속에 있으면 세상을 향한 사랑이 없어지고,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게 됩니다.

둘째, 형제를 향해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속에 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3:17).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형제를 통해 표현됩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면 이웃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이 넘치게 되고,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형제 사랑도 없어집니다.

셋째,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말세의 특징은 자기 사랑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2). 지독하게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배우자도 자식도 부모도 선생님도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잃는 길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요12:2a)라고 합니다.

넷째,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돈 때문에 벌어지는 각종 범죄가 매일 신문에 나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돈을 섬기면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맘몬은 재물의 신 이름입니다. 우리는 돈을 지배해야 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출로 만족하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5:10). 물질은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있고, 만족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다섯째, 쾌락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자는 가난한 자가 되고 포도주와 기름을 사랑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잠21:17). 육신적 쾌락은 성령의 열매로서의 희락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주님은 마음 속에 기쁨을 주시는데,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기쁨이 아니라 주위 상황과 관계없이 기쁜 그런 기쁨입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자는 그 안에 하나을 사랑하는 마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은 저주받은 마음 상태입니다. 복된 마음 상태는 이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시7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