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말씀: 요 5:10-16 요절: 요 5:15

주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9). 주님은 안식일에 많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안식일로 인한 수 많은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십계명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 엄격하게 준수했던 계명이 안식일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 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평가가 엇갈리고, 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이르되, 그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다른 이들은 이르되,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기적들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가운데 분열이 생겼더니](요9:16). 어떤 바리새인은 안식일을 안 지키는 예수님은 죄인이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 어떤 이는 죄인이 어떻게 기적을 행하느냐? 고 주장했습니다. 베데스다의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날도 다른 많은 병자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상당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고, 모세 오경의 율법을 범하는 죄인으로 정죄 받았습니다. 주님은 구약의 율법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이 율법을 어기는 분으로 보였습니다. 이는 그들의 기준이 성경이 아니라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신앙이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생명을 살리지만 전통과 사람들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잘 정비된 종교 체계를 가지는 것이요,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사람을 죽입니다. 전통, 종교, 의식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10절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오늘은 안식일이니 네가 침상을 나르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느니라, 하매](10). 유대인들은 법치주의의 화신이요, 성경은 문자 그대로 믿고,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진정한 유대 근본주의자들인가?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성경 신자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문자 그대로 지키며,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불같은 진노를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질투심이나 죄악에 대한 분노,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의 외식일 뿐입니다. 만약 주를 향한 특별한 질투로 인해 일어난 분노라면 주님께서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주의 계명에 신실한가!”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위선과 외식으로 자신들의 종교성을 드러낼 뿐이어서 주님은 이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 가운데 하나는 위선과 외식입니다. 위선과 외식은 속은 썩어 있고, 비어있지만 겉모양은 그럴 듯한 것입니다. 경건의 모습은 있지만 능력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종교적 의무와 형식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연수가 오래되면 점점 외식을 일삼는 위선자들이 많아집니다. 속에는 평안도 기쁨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러했는데, 호세아는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로 거두며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 이는 지금이 곧 [주]를 찾을 때이기 때문이라. 마침내 그분께서 오사 의를 비같이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고 말씀하십니다.

외식과 위선의 특징은 첫째, 본질보다 현상에 치중한다는 것입니다. 속보다는 밖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자신의 가르침으로 그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하니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 하시니라.] (막12:38~40). 영적인 능력, 영적인 기쁨, 영적인 평안, 사랑, 공의와 같은 내적인 것, 본질적인 것보다 외적인 행사, 밖으로 보이는 결과에 더 민감해 집니다.

둘째, 하나님보다 사람의 관심을 끄는데 더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더 길게 기도하고, 긴 옷을 입고, 높은 자리,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타이틀을 가지면 뭔가 된 줄로 압니다. 구제를 해도 사람들 앞에서 합니다. 선을 행해도 사람들 앞에서 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기 때문이니 그 겉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도다.](마23:27-28).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면 금방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셋째, 인간의 능력과 지혜, 지위를 높입니다. 위선자들의 특징은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 말씀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머리 수, 거두어지는 헌금의 액수, 건물의 크기와 같은 것들로 성공의 척도로 삼습니다. 이득을 경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와 성공으로 영적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위선의 누룩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특징은 하늘이 아니라 땅의 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가 능히 하늘과 땅의 생긴 모습은 분별하거니와 어찌하여 이때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눅12:56).

넷째,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 사람들의 가르침을 더 높이 둡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두는 비성경적이요, 반성경적인 신앙을 보셨습니다. [그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그들이 빵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또한 어찌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이르시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무엇이든 내가 드려 /부모님을/ 유익하게 할 것이 예물이 되었나이다 하기만 하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아도 /의무를/ 면제받으리라, 하여 너희 전통으로 이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가 되게 하였음이로다. 너희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 잘 대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내게 가까이 오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거니와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마15:1~9). 그들은 공공연히 십계명 중에 하나인 다섯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입술만 가까울 뿐 사람들의 명령을 교리로 가르치는 헛된 경배자임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영과 진리로 경배하는 자만이 참된 경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요4:24).

이는 안식일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을 잘 지켰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너희의 전해 내려온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가 되게 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기 때문이니라, 하시더라.] (막7:13).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정해 두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씨 뿌리지 말 것. 2. 밭 갈지 말 것. 3. 곡식 단을 묶지 말 것. 4. 곡식을 거두지 말 것. 5. 곡식을 타작하지 말 것. 6. 곡식을 까불지 말 것. 7. 곡식을 갈아 가루로 만들지 말 것. 8. 곡식을 찌지 말 것. 9. 채질하지 말 것. 10. 반죽하지 말 것. 11. 굽지 말 것. 12. 털 깎지 말 것. 13. 빨래하지 말 것. 14. 때리지 말 것. 15. 염색하지 말 것. 16. 실 짜지 말 것. 17. 밧줄 끌지 말 것. 18. 두 끈 만들지 말 것. 19. 두 실을 짜지 말 것. 20. 두 실을 가르지 말 것. 21. 매듭을 짓지 말 것. 22. 매듭(끈)을 풀지 말 것. 23. 바늘로 두 번 깁지 말 것. 24. 두 뜸을 깁기 위해 찢지 말 것. 25. 사슴을 잡지 말 것. 26. 죽이지 말 것. 27. 껍질 벗기지 말 것. 28. 소금치지 말 것. 29. 그 가죽을 만들지 말 것. 30. 머리털을 밀지 말 것. 31. 그 것을 깎지 말 것. 32. 두 글자를 쓰지 말 것.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지우지 말 것. 34. 집 짓지 말 것. 35. 헐지 말 것. 36. 망치로 납작하게 때리지 말 것. 37. 불을 끄지 말 것. 38. 불을 켜지 말 것. 39.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물건을 옮기지 말 것. 이렇게 39개의 금법을 정해 두었습니다. 안식일에는 2000큐빗 이상 걸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계명이 아니라 조상들의 유전이요, 사람들의 계명입니다.

혼의 안식을 위해 제정해 둔 안식일이 혼을 속박하는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을 속박합니다. 종교는 무거운 짐입니다. 의식은 사람에게 의무만 강요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입니다. 반면 영이신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안식과 평안을 줍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해서 지키는 일은 혼을 새롭게 하는 매우 복된 일입니다.[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음이니라, 하라.](출31:17). 그러나 의문(儀文)으로서의 전통은 사람의 혼을 더욱 지치고 파리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에 대해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만드신 것이요,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니](막2:27). 안식일이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율법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복과 행복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내 법규와 내 법도를 지킬지니 사람이 이것들을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리라. 나는 [주]니라.](레18:5). 주님은 행하면 살게 되는 법을 주셨을 뿐 행하면 죽게 되고, 힘들게 되고, 지치게 되는 법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주님께서는 안식일 제정 목적과 입법 취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공격할 것을 찾지 못하자 유일하게 시비를 걸 수 있었던 부분이 안식일에 대한 계명이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사역동안 내내 안식일 문제로 판단과 정죄를 받았고, 바리새인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고, 일을 하신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째,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主)란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다 바리새인들에게 걸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즉시 주님께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행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느냐? 하매](눅6:2). 그 때 주님은 구약의 다윗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主)니라, 하시더라.](눅6:5). 주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시며, 안식일이란 법아래 있지 않고, 안식일의 법 위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일은 주님을 위한 것이요, 주님 자신의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란 무슨 뜻인가? 주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안식일이란 계명의 최대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 까닭은 이것이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출31:13). 모든 계명의 궁극적 목적은 그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하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가정 교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訓育)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믿음이 온 뒤에는 우리가 더 이상 훈육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니] (갈3:24~25). 십계명 중 안식일 준수 또한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둘째,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란 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시더니 거기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더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을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려 하시는가 지켜보거늘](눅6:6-7). 바리새인들은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안식일에는 해서는 범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로 예외를 둔 것은 사내 아이가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인데, 할례를 행해야 하는 일이 안식일과 중복되면 그 때는 할례를 행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안식일일지라도 할례를 주었습니다(요7:22-23). 마찬가지로 주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율법에 맞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묻겠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 악을 행하는 것이 맞느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맞느냐, 죽이는 것이 맞느냐? 하시며](눅6:9). 바리새인들의 주장은 안식일이 아닌 엿새 동안에 병을 고치고 안식일에는 고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회당의 치리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으므로 분을 내며 사람들에게 이르되, 사람들이 마땅히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러므로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눅13:14). 주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 위선자여, 너희 각 사람이 안식일에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보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그 매인 것에서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눅13:15-16). 문자적 율법주의는 대단한 믿음 같지만 실제로 성경을 왜곡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종교입니다. 주님은 율법 조문의 사역자가 아니시라 영의 사역자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율법 조문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이는 율법 조문은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라.](고후3:6).

다시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오늘은 안식일이니 네가 침상을 나르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느니라, 하매](10). 유대인들은 병 나은 사람에게 축하를 해 주거나, 병을 낫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일에만 눈에 불이 켜졌습니다. 지금 핵심은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것보다 침상에 누워있던 사람이 어떻게 침상을 들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는가? 에 대한 관심이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오늘날 안식교도들만큼이나 안식일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안식교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자신들만이 참된 신자인 행세를 하지만 안식일에는 모여서 집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안식을 취해야 합니다. 집회를 위해 모이는 자체가 불법입니다. 차를 타고 먼 길을 달려서 안식교회로 가는 것은 안식일 법에 따르면 위반입니다. 안식일에는 가스 스토브나 전자레인지 등에 불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에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출35:3). 그러나 안식교도들이 금요일 저녁부터 껌껌하게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교회 역시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날은 너희에게 안식하는 안식일인즉 너희는 너희 혼을 괴롭게 하되 영원한 법규에 따라 그리할지니라.](레16:31). 안식일은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안식일에 대해 시비를 걸며 ‘비성경적이다. 율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께 안식일 문제로 시비를 걸었던 바리새인들보다 더 큰 무지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2:16)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 경찰 정도에 해당하는 지위인지라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사람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당장 티켓을 발부하고, 벌금을 때립니다. 구약에 따르면 안식일을 어기면 반드시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 병이 나아 침상을 들고 걸어감으로 그는 졸지에 현장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세상을 얼마나 거스르는 일인지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령 충만하고, 은혜 충만하고, 말씀이 충만하면 그 날부터 여러분들의 행동은 보통 교회에 다니는 외식적인 종교인들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되며, 미워하는바 되고, 그들을 거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일은 일반 교인들에게는 충격이며,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응답하되, 나를 온전하게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시더라, 하니](11). 그러나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이 왜 침상을 들고 걷는지 당당히 이유를 밝혔습니다. “나를 온전하게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종교적 규례를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 질책을 받으면서도 그는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은 제 뜻이 아니라 누가 시켜서...’ 등으로 변명한 것이 아니라, "나는 받은 명령대로 행하고 있는 중이니 너희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는 식입니다.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그는 변명하는 대신 자신이 순종하고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받은바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의 마음은 늘 담대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그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행동 원칙인 사람은 두려움을 모릅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눈치나 보고, 직장에서 동료들과 상사의 비위를 맞추느라 굽신 거리고, 두려워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닐 뿐 아니라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고, 주님을 증거하는 계기로 만들었습니다. 자신도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을 증거한 것입니다.

12-13절입니다. [그들이 그에게 묻되, 네게,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에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님께서 이미 자리를 옮기셨음이라.](12-13). 유대인들은 즉시 누가 그런 지시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감히 어느 누가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걸아 가도록 명했단 말인가? 누구냐? 그러나 병을 나음 받은 사람 자신도 주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침을 받았을 뿐 고쳐 주신 주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계셨던 곳을 보아도 이미 주님은 그 자리에 없으셨습니다. 유대 명절인지라 사람은 많고, 주님은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이미 자리를 옮긴 후였습니다.

주님은 병을 고쳐 주신 후에 그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이나 주소나 banking account를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오늘날 신유 은사를 지녔다고 하면서 성도들의 머리에 안수해 주면서 노골적으로 헌금을 요구하는 부흥사들의 영과는 완전히 다른 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몇 병자를 고쳐 준 일을 평생 동안 설교에 사용해 먹고, 간증하고, 책으로 출판하고, 자랑하며 사람을 끌어 모으는 부류의 목사들 역시 주님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역 방법입니다. 주님은 못 고치시는 병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거기서 물러나시니 큰 무리가 그분을 따르매 그분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알리지 말라 명하시니라.](마12:15~16). 참된 주님의 사역에는 위협이 따르고 반대가 따르고 모함이 따릅니다. 주님은 자신이 병을 고치신 사실을 알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하셨습니다. 누군가 주님의 은혜로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면 그는 자신이 가진 은사를 숨기려 할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14절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를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온전하게 되었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하시매](14). 주님은 후에 성전에서 고침을 받은 병자를 다시 만나 주셨습니다. 첫 만남은 베데스다 연못 곁에 있는 행랑이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그는 은혜의 집, 긍휼의 집에서 주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온전케 된 그는 이제 성전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배하러 성전에 온 것입니다. 두 번째 만남입니다. 병자는 병을 나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배함으로 다시 한번 주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보라, 네가 온전하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온전케 되었으니 어떻게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고침을 받으면 더 심한 것이 생기기 않도록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그의 병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란 사실을 암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더 심한 것이라 더 큰 질병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무릇 주의 능력, 복음의 능력으로 온전케 된 성도는 이제부터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을 위해 살 때 마음은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탐욕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육신의 일들만 하게 됩니다.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무릇 온전케 된 자는 자기 정욕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즉 그는 자기 육체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리라.](벧전4:2).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은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 받은 사람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았던 한 사람의 예가 있습니다. [부정한 영이 사람에게서 나와 마른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구하나 찾지 못하므로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거늘 이에 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되니라.] (눅11:24~26). 주님이 마귀를 물리쳐 주었다고 해서 자신을 텅 빈 채로 그냥 두면 다시 마귀 들릴 수 있습니다. 병이 낫고 다시 죄를 범하면 더 큰 병이 들 수 있습니다. 병이 들리고, 마귀 들리는 일은 죄의 결과요, 죄의 현상입니다. 죄는 뿌리요, 병은 결과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죄악된 습관, 죄악된 생활, 죄악된 사고 방식을 그대로 둔 채 아무리 병을 고쳐보아야 다시 재발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변화된 삶, 새로운 삶, 영적인 삶을 살도록 촉구하신 것입니다. 병자들은 병이 남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질병 이전에 자신의 죄악된 삶을 회개하고, 씻음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를 용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하시니라.](요8:11b). 주님은 범죄한 혼들이 회개할 때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시지만 용서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침을 받고, 용서를 받고, 마귀가 쫓겨나는 등의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지만 그 이후는 더욱 중요합니다. 구원받은 후에는 구원받기 전보다 더 중요합니다. [만일 그들이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하여 세상의 오염에서 벗어난 뒤에 다시 그 안에 말려들어 지게 되면 그들의 나중 결과가 처음보다 더 나쁘리니](벧후2:24). 고침을 받은 것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건강한 삶의 시작이듯이 구원받은 것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으로 경건한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구원은 finish line이 아니라 start line입니다. 베데스다의 병자는 38년 된 병으로부터 온전케 되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던 영이 온전케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20년 된 죽음으로부터, 어떤 이는 30년 된 죽음으로부터, 어떤 이는 40년된 죽음으로부터 살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우리는 모두 “온전케 되었은즉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15절입니다. [그 사람이 떠나가서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온전하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라 하니라.](15). 그는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자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온전하게 하신 분이 예수님임을 증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들의 특징은 전파입니다.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병을 고치신 예수님에 대해서 놀라고, 두려워해야 할 것 같은데, 듣는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감사와 찬양, 호기심 같은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며 죽이고자 하니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에 이 일들을 행하셨음이라.](16). 약한 자를 도우시고, 병자를 온전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님의 사역은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규례 즉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절차, 의식은 율법의 정신,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이요, 본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음이라.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저것도 행하지 않은 채 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마23:23). 우리를 온전케 하신 주님은 그 일로 인해 세상에 배척을 받고, 미움을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