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말씀: 요 5:1-9 요절: 요 5:8,9

오늘은 요한복음에서 행한 주님의 세 번째 기적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한 이적들의 영적 의미를 제시하는 책인지라 이적마다 분명한 영적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행한 이적인 물을 포도즙으로 만든 사건은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온다’는 점을 선포한 이적입니다. 두 번째 행한 어떤 귀족의 아들이 병에서 나은 사건은 ‘구원은 믿음으로 온다’는 점을 선포한 이적입니다. 오늘 행한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사건은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오랜 고통 가운데 하나는 단연 질병입니다. 질병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구약의 3대 재앙은 기근, 질병, 전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주님은 기근, 질병, 전쟁을 보내셔서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예표하는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 강력한 질병을 보내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병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요, 현상입니다. 에덴에는 질병이 없었습니다. 슬픔도, 눈물도 없었습니다. 사망도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죄의 결과요, 죄의 현상들입니다. 죄가 없다면 죽음이 없을 것입니다. 죄가 없다면 질병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사역에서 병자를 돌보시는 일을 매우 많이 하셨습니다. 사복음서에는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주님은 말씀 사역을 주로 하셨지만 병자들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보내실 때도 병자를 고쳐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부정한 영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내쫓으며 온갖 질환과 온갖 질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초대 교회의 사도들 역시 병자들을 고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바울은 병자들을 고치는데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치유 사역에 놀라운 이적들을 보이곤 했는데, [심지어 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질병들이 그들에게서 떠나고 악한 영들도 나가더라.](행19:1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도들의 표적이었고, 오늘날 각 교회마다 드러나는 능력은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질병은 마귀의 역사이기 때문에 병이 걸리면 무조건 마귀를 쫓아내는 축사(逐邪)를 행합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병을 낫게 해 준다며 안수를 하기도 합니다. 모두 약간씩 일리는 있는 말씀이지만 온전한 진리는 아닙니다. 질병은 하나님이 주신 것일 수도 있고, 마귀가 준 것일 수도 있고, 죄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1절입니다. [이제 이 일 후에 유대인들의 명절이 있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1). 때는 유대인들의 명절이요,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주님이 올라가신 명절이라면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셋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이라고 봅니다. 이 명절이 유월절이라면 요한복음에는 네 번의 유월절이 나오고 주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과 일치합니다(요2:13,6:4,11:56). 어떤 이는 오순절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분명하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거의 없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로서 지켜야 할 율법을 잘 준수하셨는데, 이는 주님께서 율법 아래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깨뜨리시거나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수하러 오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셨고, 병자를 고치셨으며, 죄인들을 초청하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절입니다. [예루살렘의 양(洋) 시장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 주랑(柱廊) 다섯 개가 있고](2). 예루살렘 성전의 처음 문이 양문입니다. 양 문은 어린 양을 성전 안으로 들고 가는 문이었는데, 이 곁에 양 시장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는데 뜻은 은혜란 뜻입니다. 희생물인 양 시장 옆에 은혜의 연못이 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주님의 긍휼은 언제나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법입니다. 주랑이 다섯 개 있었는데 이것도 평범한 환경 묘사가 아닙니다. 다섯은 죽음을 나타내는 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모든 은혜는 주님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으며, 긍휼은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만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면서 맨 먼저 양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 문을 건축하고 거룩히 구별하여 문짝을 달고 메아 망대와 하나넬 망대에 이르기까지 거룩히 구별하였고](느3:1).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살아 갈 길이 양 문을 통과해 들어가 주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엉망인 분들은 가장 먼저 양문을 수축해야 합니다. 예배를 회복함이 없이는 어떤 일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모든 문들 가운데 양 문이 가장 먼저 건축되었듯이 우리 역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배의 회복이 삶에 맨 첫 자리를 차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3-4절입니다. [그 안에 허약한 자, 눈먼 자, 다리 저는 자, 몸이 오그라든 자들의 큰 무리가 누워서 물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니 이는 어떤 때에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는데 물을 휘저은 뒤에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에 걸렸든지 온전하게 되었음이더라.](3-4). 베데스다의 연못 주위에는 불치병 환자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여기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약한 자, 눈먼 자, 다리 저는 자, 몸이 오그라든 자들이 누워서 연못만 바로 보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는데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지 낫는다는 것입니다. 언제 천사가 내려올지 기약이 없습니다. 천사가 물을 휘저어도 문제는 있습니다. ‘누구든지 들어가는 자는 온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이란 조건이 있습니다. 이는 치열한 경쟁을 예고합니다. 허약한 자가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까? 눈 먼 자가 먼저 들어갑니까? 다리 저는 자가 먼저 들어갑니까? 몸이 오그라든 자는 어떻게 들어갑니까? 베데스다는 은혜의 장소요, 치유의 장소이긴 하지만 비극의 장소요, 모순의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정작 중병에 걸린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가벼운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합리하고 모순 덩어리입니다. 반신불수가 되었거나 숨쉬기도 힘든 중병 환자들보다는 손가락에 약간의 상처가 났거나 무좀이 걸린 사람들이 먼저 달려 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얼른 보면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지만 문이 너무 좁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께 나아오면 먼저 나오든지, 나중에 나오든지 상관없이 구원받습니다. 경쟁을 통해 승리한 사람이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베데스다의 연못 주위에 모여서 물이 휘저어지기를 기다리는 병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허약한 자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이라.](롬5:6).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조그마한 유혹도, 시련도, 죄도 이길 수 없는 불구자나 다름없습니다. 성도들 역시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오 [주]여, 내가 연약하오니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오 [주]여, 나의 뼈들이 괴로워하오니 나를 고치소서.](시6:2), [나는 연약하며 심히 상하였으니 내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였나이다.](시38:8).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토로하는 고백입니다. 소경을 보십시오. 이 세상은 영적 소경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의 지각(知覺)은 어두워지고 그들 속에 있는 무지(無知)와 그들의 마음이 눈먼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엡4:18). [사악한 자들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들은 심지어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 (잠4:19). 이것이 현실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라오디케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가련한 것과 비참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모두 베데스다의 연못 곁에 있는 병자들의 모습입니다. 다리 저는 자는 제대로 걸을 수 없고, 달릴 수 없습니다. 몸이 오그라든 자들은 무기력의 극치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힘으로 밥 숟가락도 들기 힘든 사람들인데, 주님 앞으로 나오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들을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주변을 둘러 보십시오. 분명히 베데스다의 연못가와 흡사합니다. 여기에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아무도 찾아 오는 이가 없는 이곳에 주님이 방문하셨습니다.

그럼 현대인들은 왜 연약함과 무기력, 질병 가운데 사는 것입니까? 이는 죄 때문입니다. 질병은 죄의 현상입니다. 질병은 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징계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믿고, 순종하는 백성에게는 질병을 내리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내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내 명령들을 귀담아 들으며 내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는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출15:26). [또 [주]께서 모든 병을 네게서 제거하사 너희가 알고 있는 이집트의 그 악한 질병을 네게 두지 아니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두시리라.](신7:15). 유대인들은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 때에 해를 받지 않았는데 주님이 그들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콜레라, 에이즈, 조류 독감, 사스와 같은 전염병이 돌 때 주님은 범죄하지 않는 자기 백성들을 철저히 지키시는 것입니다.

건강한 삶을 사는 비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주님을 찬송하며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오 내 혼아, [주]를 찬송하며 그분의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 그분께서 네 모든 불법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질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멸망에서 구속(救贖)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네게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입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2~5). 암에 걸린 환자가 부흥회에 참석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후 매일 찬송가를 백번씩 불렀는데, 암이 씻은듯이 나았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를 기억할 때 주님은 모든 불법을 용서하시고,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은 말씀을 보내어 병을 고쳐 주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며 멸망들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 (시107:20). 히스기야는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을 보내 주셔서 그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말씀을 보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치유하십니다. 아사는 발에 병이 들었을 때 의사만 찾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아사가 자기의 통치 제삼십구년에 발이 병들어 그 병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주]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대하16:12). 설교 시간에 설교를 잘 들어도 많은 병이 낫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마음 속에 보내셔서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심으로 육체에 걸린 병들까지 치유하십니다.

셋째,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는 내 얼굴의 건강이시요, 내 하나님이신 그분을 내가 여전히 찬양할 것임이로다.](시42:11.43:5). 주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혈색이 사색이 되지 않습니다. 얼굴에 기쁨과 평안이 넘쳐 납니다. 이런 사람은 병마가 침투할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근심, 불안, 염려가 속에 가득하면 없던 병도 생기는 것입니다.

넷째,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양식이며, 건강이 됩니다. [이것이 네 배꼽에 건강이 되며 네 뼈들에 골수가 되리라.](잠3:8), [그 까닭은 그것들을 찾는 자들에게 그것들이 생명이 되며 그들 모두의 육체에 건강이 되기 때문이니라.](잠4:22). 산삼을 먹고, 벌꿀을 먹고, 각종 보약을 먹는 것이 예방 의학이라고 하지만 참된 예방 의학은 말씀을 읽고 암송하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 성경을 암송하고 묵상하며 양식으로 삼는 사람들은 질병에 시달리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나 디모데와 같이 주님이 주신 연약함은 감사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다섯째, 혀를 잘 사용하십시오. 말은 건강의 핵심 요소입니다.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2:18). [사악한 사자(使者)는 해악에 빠져도 신실한 대사(大使)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3:17). [즐거운 말들은 벌집 같아서 혼에 달고 뼈에 건강을 주느니라.](잠16:24). 우리는 언어 생활을 통해 그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하는 대로 되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무슨 쓸데없는 말이든지 모두 주님께 회계 보고를 해야 합니다. 말로 혼에 상처를 입힌 사람은 칼이나 채찍으로 몸에 상처를 입힌 것과 같은 죄입니다. 영을 상하게 하는 일은 몸을 상하게 한 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병원의 병실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혀로 인해 몸과 혼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약물을 투여 받고 있습니다. 말은 씨앗입니다. 불화의 씨이기도 하고, 화평의 씨이기도 합니다.

여섯째, 주님이 택한 금식을 하라.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입히며 네 살붙이를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주님은 바른 금식의 의미를 말씀해 주시면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쏟아지고 네 건강이 신속히 솟구치며 네 의가 네 앞에서 나아가고 [주]의 영광이 네 후위대(後衛隊)가 되시리니](사58:8). 저는 모든 성도들이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사도 요한도 사랑하는 형제 가이오에게 건강을 기원하는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무엇보다도 네 혼이 형통함같이 네가 형통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노라.](요삼1:2). 저는 누구처럼 신유의 은사가 있어서 머리에 손만 얹으면 낫게 하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여러분이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전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금식을 하십시오. “네 건강이 신속히 솟구치며”란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 죄를 회개할 때 건강해집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전혀 없는가, 거기에는 의사가 하나도 없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내 백성의 딸의 건강은 회복되지 아니하는가?](렘8:22). 유향은 약재입니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약과 의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회복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런 것을 세상에서는 불치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이유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뜨겁고 효력 있는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6). 교회는 아픈 형제들의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들은 서로 고백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악독과 시기와 쓴 뿌리를 그대로 안고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덟째, 대속의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마8:17).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연약함과 질병을 짊어졌습니다.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나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나의 질병을 짊어 지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질병의 치유는 왕국복음과 함께 전파되었을 때 기본 사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는 이 시대에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런 표적으로서 치유의 역사는 흔치 않습니다. 대신 마음속에 임한 하나님의 왕국-의와 화평과 희락-(눅17:20, 롬4:17)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말이 아니라 권능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기 때문이라.](고전4:20).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의, 희락, 화평이 모든 것을 이길 강력한 권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 외적인 신체적 질병의 치유없이도 건강을 회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속의 진리,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표적으로서의 병고침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건강을 회복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 능력의 역사를 우리는 언제나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홉째,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눈을 멀게 하기도 하고, 귀를 멀게 하기도 하고, 벙어리를 만들기도 하며(마12:22), 갖가지 질환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욥에게는 피부병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청년에게는 무덤 사이에 거하며 자해(自害)하며 발광하게 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불과 물에 자주 던지기도 했습니다(막9:22).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부류의 마귀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이기는 법이 어렵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약4:7). 성도는 마귀를 이길 힘과 권세가 있습니다. 대적하면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벧전5:8). 어린 양의 피와 증거의 말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계12:11).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요16:33). 그리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십시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굳게 서서 대적한다면 승리는 저절로 보장됩니다.

교회에 병자들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 병이 생기고, 원인 모를 병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영이 건강해야 몸의 치유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애써 자신의 질병이 영적인 문제, 죄 문제, 마귀로 인한 문제란 사실을 부인하고 외면하려 듭니다. 영, 혼, 몸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영과 몸의 관계를 보십시오. [즐거운 마음은 약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17:22). 혼과 영의 관계를 보십시오. [즐거운 마음은 얼굴을 밝게 하나 마음의 슬픔은 영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5:13). 다시 영과 질병의 관계입니다. [사람의 영이 그의 병약(病弱)한 것을 지탱하려니와 상처 입은 영은 누가 감당하리요?] (잠18:14). 이런 이유로 우리는 속사람이 강건해야 합니다.

베데스다의 연못가에 있는 모든 종류의 병자들이 실은 우리 교회 내에 넘실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병자인줄도 모르고 삽니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 장수하는 방법을 기술해 두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떠나 불신과 불순종을 일삼을 때 질병을 보내십니다. [[주]께서 네가 당할 재앙과 네 씨가 당할 재앙을 놀라운 것으로 만드시리니 그 재앙이 심히 크고 오래가며 질병이 심하고 오래가리라. 또한 그분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이집트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붙게 하실 것이며](신28:59, 60).

5절을 보십시오. [거기에 삼십팔 년 된 병약자(病弱者) 한 사람이 있더라.](5). 참으로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생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베데스다의 연못에 들어가 나을 수도 있을 것이란 소망 때문일 것입니다.

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운 것을 보실 때에 이제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 하시니](6). 병자는 물이 끓기를 소망했지만 그에게 찾아 온 것은 생명의 주님이셨습니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병자가 아니라 그 한 사람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구원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1:1 개인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 주님은 먼저 우리의 소원을 물으시고, 우리의 반응을 보십니다. 그냥 주시지 않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란 말씀대로 구하게 하십니다. 찾게 하십니다. 두드리게 하십니다.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 같지만 주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많은 성도들이 마음에 가득한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며 솔로몬에게 물으셨습니다. 살로메에게도 물으셨습니다. 소경에게도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시2:8).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십니다.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란 말씀은 합당한 반응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네, 낫고자 합니다.”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낫고자 하는 소망과 의지마저 잃어버린 병자에게 주님은 여기에 누워 있는 궁극 목표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주님의 질문에 병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허약한 사람이 그분께 대답하되, 선생님이여, 물을 휘저을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병자는 주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대신 자신이 나을 수 없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도와줄 조력자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안 됩니다. 이것이 병자의 하소연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고, 변명 없는 죄 없다고 병자는 주님 앞에 논리적이고도 합당한 이유를 댔습니다. 그는 자신이 병이 나을 수 있는 방법은 끓는 연못에 들어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나에게 낫고자 하느냐? 고 물으신 선생님께서 물이 끓으면 나를 먼저 좀 넣어 주십시오.”란 바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자신의 조력자로 생각합니다. 주님을 주인이 아니라 참모, 비서, 도우미 정도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고자 하는데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병자는 자기가 아는 방법대로 병이 나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고, 누가 도움만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네가 성공하고자 하느냐?”고 물으셨다고 합시다. “네”라고 대답했으면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성공에 대한 자기 기준과 방식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승진을 시켜 주시고, 이번에는 돈을 벌게 해 주시고, 이번에는 무슨 일을 처리해 주시고....란 식입니다. 주님을 자신의 조력자로 부려 먹습니다.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불안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이런 방식이 아닌데요...”라고 한다면 주님은 “내가 왜 네가 시키는대로 해야 하느냐?, 왜 너의 방식대로 해야 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주님, 제가 아는 방식을 포기합니다. 주님 방식대로 주님께서 마음대로 해 주십시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는 방법,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원하는 방식대로 처리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병자는 자신의 상황을 주님께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말했습니다. 낫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가 있음도 말했습니다. 주님은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8-9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온전하게 되어 자기 침상을 들고 걸어가니라. 마침 이 날은 안식일이더라.](8-9). 주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만 하셨습니다. 머리에 안수를 하거나 손을 만질 필요도 없습니다. [빛이 있으라]하신 주님께서 동일하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하셨습니다. 참으로 권능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바로 능력입니다. 말씀 자체가 바로 치유요, 생명입니다. divine words- divine power- divine vehicle!!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가게 하심으로 이 일은 은밀히 행하신 일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침상에 누워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38년이나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걸었습니다. 자신의 병든 몸을 지탱했던 침상을 이제 자신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치유는 완전한 치유요, 주님의 능력은 완전한 능력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인 줄 알면서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병자는 안식일에 금지된 명령임을 알면서 순종했습니다. 그는 일어났을 뿐 아니라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분노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순종을 통해 완전해 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직접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꿈에서라도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소위 직통 계시라고 하며, 영음을 들었다,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간증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틀리는지 맞는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입으로 하는 말보다 기록된 말은 더 분명하고 더 강한 구속력이 있듯이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과 동등한 절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말씀하셨듯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기록된 말씀을 선포하심으로써 자신이 직접 하시는 말씀과 동일한 권위와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평생 동안 앓고 있는 병을 말씀만으로 능히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내게 와서 도와주는 이 없을 때, 내 안에 아무 소망이 없을 때, 아무 능력이 없을 때 그 때 주님이 내게 찾아오시며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제 여러분이 대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