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말씀: 요 5:17-29 요절: 요 5:19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안식일에 관련된 율법 논쟁을 통해 주님은 안식일에 대한 바른 성경적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곧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19절부터 47절까지 긴 장문의 설교를 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두 차례에 걸쳐 주님은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5:19,30)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이적들, 권세 있는 말씀들, 행하신 표적들은 주님이 스스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행하신 일이란 것을 증거하는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거한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우리 주님과 같이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5:19,30)는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된 능력의 길, 복된 길은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가 아니라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에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에 있지 않고, “나는 할 수 없다.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선포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게 대답하며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내 영으로 되느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슥4:6). 이 진리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에게는 달리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왜 안식일에 일을 하셨으며, 왜 일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독특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신 많은 이유가 있지만 17절은 가장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17).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기 때문에 나도 일한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준 주님의 답변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을 비롯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 일하시고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쉬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음이니라, 하라.](출31:17). 그런데 주님은 병자를 고치신 후에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라고 하심으로 안식일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놀라운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6일간 일하시고 7일째 복을 주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안식하셨습니다. 주님은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닙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영존하시는 하나님, 주 곧 땅 끝들을 창조하신 이는 기진(氣盡)하지 아니하시고 피곤하지 아니하시며 그분의 명철(明哲)은 찾을 길이 없도다.](사40:28). 그러나 주님의 안식은 곧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담이 범죄한 그 날부터 다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이라고 쉬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시고, 요한계시록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시기까지 주님은 결코 쉴 수가 없으십니다. 이는 우리 주님의 증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5:17). 하나님은 계속해서 일하시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주님은 일을 하시되 열심히 일을 하시며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아침, 낮, 저녁 구분 없이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의 정권과 화평이 번창하여 끝이 없으며 /그가/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군림(君臨)하여 그 왕국을 정비(整備)하고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시리라. 만군의 [주]의 열심(熱心)이 이것을 이루리라.](사9:7). 하늘의 왕국은 영원히 견고히 세워질 때까지 주님은 열심히 일하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수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라고 말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했습니다. 이 또한 유대인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긴 해도 “내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불렀지만 주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 결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고 무식이 충만한 소리를 합니다. 예수님은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은 하나님 아들입니다.” 사람 아버지의 아들은 사람아들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은 아버지와 자신은 동시에, 똑같이 일한다는 점을 말씀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 따로 있고, 내 일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일이 자신이 하는 일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가족 관계에서는 아버지는 일하는데 아들은 쉬고 있거나 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일하면 아들은 놀거나 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자신의 동등성, 일체성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은 아버지와 함께 한 일이요,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 유대인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말이기도 하거니와 감당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인하여 더욱더 그분을 죽이고자 하니 그 까닭은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셨기 때문이더라.](18).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선포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들었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종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요, 신성 모독 때문이니 곧 사람인 네가 스스로 하나님으로 행세하기 때문이니라.](요10:33).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들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빌2: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주님은 안식일을 범했다는 죄목에 신성모독이란 죄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매 우리 법대로 하면 그가 마땅히 죽으리니 이는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행세하였음이니이다.](요19:7).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자신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19- 47절까지 주님은 자신에게 분노하며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구원, 부활, 심판 등 핵심 진리들이 모두 선포되었습니다.

19절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 이는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그 일을 아들도 그와 같이 하기 때문이니라.](19).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보고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보여 주신대로 만들었는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보여 주신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시는 일을 보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도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계시며, 보는 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역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하는 것이며, 이 말은 주님 자신이 하는 일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은 전적인 상호 의존적 존재입니다. 이 셋은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요16:13). 주님과 성령께서 이러하시다면 우리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존하고 밀착해야 하는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단독자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전적인 의존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선언하신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신성에 어떤 제한적인 요소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 일들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란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은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버지의 일이란 뜻입니다. 결국 이 말은 아버지와 하나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들이...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는 선포는 주님이 무능력자란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의지와 지성과 권세에서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으며, 연합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부인이 말하기를, “저는 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남편과 상의해서 해야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며, 자신이 가진 돈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결코 자신의 선택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없노라”고 선포한다면 그는 진정한 능력자가 될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15:4-5). 우리의 의지가 주님의 의지에 굴복하여 하나가 되고, 우리의 지성이 주님의 지혜로 충만하여져서 하나가 되고,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다면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빌4:13). 이것이 진정한 능력입니다.

잘못된 현대 기독교의 복음은 “나는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존감을 높여 줍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강조합니다. 강단에서 자주 선포되는 설교 가운데 하나는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개역, 막9:23)와 같은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개역, 빌4:13)와 같은 말씀이 강력하게 선포됩니다. 결코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진리는 좀처럼 선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외치기 전에 자신의 무력함, 연약함, 쓸모없음에 대해서 깊이 자각하도록 주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는 고백이야말로 참된 능력과 승리를 향한 첫 걸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인줄로 생각하면 그는 속은 것입니다. [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라.](갈6:3).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집니다. [그런즉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고전10:12).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일은 주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개인의 사업이든 결혼 생활이든 교회 문제든 사회 생활이든 무슨 일에서나 “저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도우시고 붙드시지 않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구하는 자들에게 진실로 주님의 강하신 권능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20-21절입니다. [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를 놀라게 하시리니 이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사 살리시는 것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기 때문이니라.](20-2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란 증거를 보여 주실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강력한 증거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신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신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운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이시오, 아버지와 동등한 분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주님은 병든 자의 병을 고쳤는데, 이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지만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병자를 고친 일만으로는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를 일으킨다면 이는 누구도 부인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죽은 자를 살리시겠다는 공개적인 선포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주님은 생명이요, 부활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그는 일으킴을 받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이는 캘빈주의자들처럼 주님이 창세전에, 만세전에 택한 예정된 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입니다. 믿는 자들이 바로 주님이 살리기를 원하는 자들이요, 주님 앞으로 나아오라는 음성을 듣고 나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말씀을 믿고 나아오는 사람이요,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죄가 많건 적건, 이전에 어떻게 살았는가와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22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2). 이번에는 심판에서 아버지와 하나 됨을 선포하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심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믿고 고백하는 심판자는 바로 나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풀어보면, ‘하나님 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신다. 왜냐 하면 아버지는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겼는데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다. 고로 내가 모든 심판을 집행하는 심판자다.’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실 수 있습니까? 아들이 자신과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에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아니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큰 백보좌 심판석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3절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23). 아버지가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이유가 나옵니까?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저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벌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한 공경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안식교도들이나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것에 차별을 두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서 동등하시며, 하나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아들을 사랑하고, 아버지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들을 믿고, 아버지를 미워하는 자는 아들을 미워하는 것이요, 아들이 없는 자는 아버지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아들을 믿지 않으면 아들이라고 선포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24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24).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첫째, “내 말을 듣고” 여러분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습니까?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습니까?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하신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영존하는 생명이 있을 것이고(미래형)이 아니라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현재형)란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요한복음 어디에서도 주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을 것이며”라는 미래형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25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듣는 자들은 살리라.](25). 죽은 자들이 어떻게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죽은 자들은 사람들의 음성을 들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세 번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셨는데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동굴 무덤에서 죽은지 나흘이나 지났던 나사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죽으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듣는 자들은 살리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적용해 볼 때 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죄인이 그 영이 살아나고 혼이 구원받는 일을 말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전도지나 설교를 통해서 울려 퍼지는 복음은 주님의 음성이요, 이 음성을 들을 때가 바로 지금이요, 듣는 자들은 즉시 살게 됩니다.

26절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는 것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사 그 속에 생명이 있게 하셨음이요,](26).

하나님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생명이십니다. 모든 생명은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을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하나님 없이는 생명이 없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시듯이 주신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삼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주다는 말은 ‘-로 삼다, 되게 하다’란 뜻이 있습니다(사42:6, 55:4).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사”란 말씀은 “아들 역시 생명이 되사, 생명으로 삼으사”란 의미입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생명에서도 하나 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근원이란 점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27절입니다.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그에게 심판을 집행할 권위를 주셨음이라.](27).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심판을 집행할 권위를 가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의미는 사람으로 오신 분이란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므로 사람이시듯,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배척을 받으셨지만 실상은 심판을 집행할 권위가 그분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줄기차게 증거하시는데 핵심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이 말에 놀라지 말라. 이는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이니](28). 주님의 음성을 듣는 대상이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들로 확대되는데 이 말씀은 백보좌 심판 때를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무덤 속에서 이미 나팔 소리를 듣고 들림 받아 하늘로 올라가고(고전15:22), 구원받지 못한 채 죽었던 죄인들은 모두 부활하여 자신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 자리마저 보이지 아니하더라.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로 인하여 심판을 받으니](계20:11-12).

주님은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이 말에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판에 대한 왜곡된 지식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진리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놀랄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지옥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다 결국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등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다음 구절은 마른하늘의 날벼락보다 더 심한 말씀입니다.

29절입니다. [선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들은 영벌(永罰)의 부활로 나오리라.](29). 부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 영벌의 부활이 그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직후 일어났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건입니다(마27:50-52).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 재림하실 때 일어납니다(고전15:52, 살전4:16,17).

셋째, 대환란 기간에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순교했을 때 이들은 생명의 부활을 얻습니다(히11:35, 계11:12, 7:14).

넷째, 천년 왕국 기간 중에 구원받을 자들이 있습니다. 천년 왕국 기간 동안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계20:12). 이렇게 네 번에 걸쳐 생명의 부활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첫 번째 부활(계20:6)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믿는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라고 말씀하지 않고, ‘선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라고 말씀하신 것은 전 세대의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 11:18에 보면 상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민족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이르고 죽은 자들의 때가 이르렀으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요, 또 주께서 주의 종 대언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주려 하심이요, 또 땅을 멸하는 자들을 멸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더라](계11:18). 이것은 분명히 백보좌 심판을 의미합니다. 반면 영벌의 부활은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백보좌 심판석에서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영원히 불타는 불못에 던져지는 심판입니다.

주님은 명절에 올라온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생명, 구원, 심판, 부활 등 전 분야에 걸친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에 놀라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과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이시며, 심판의 주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 그는 영벌의 부활,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