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요한복음 2강.

말씀: 요 1:1-16 
요절: 요 1:14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책입니다(20:30-31). 요한은 처음부터 철저히 그 한 가지 주제를 입증하기 위해 요한 복음을 기록했습니다.

1장입니다. 사도 요한은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일곱 가지씩 특징을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타이틀(이름들)을 통해 증거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말씀입니다(1-3,4). 둘째, 예수님은 빛이십니다(1:4-13).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15-18, 30-34,49). 넷째,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1:41). 다섯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1:29). 여섯째,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1:49). 일곱째,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50-51). 예수님에게 붙여진 이런 타이틀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만 사용될 수 있는 이름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1-4). 둘째, 예수님은 구원을 주십니다(9-13).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십니다(15-18). 넷째, 예수님은 성령으로 침례를 주십니다(33). 다섯째, 예수님은 사람을 다 아십니다(42,47-48). 여섯째, 예수님은 죄를 제거하십니다(29). 일곱째, 예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시고 하늘과 땅의 사닥다리가 되십니다(50-51).

예수님은 증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했습니다. 첫째, 침례인 요한입니다(7,15,29). 둘째, 사도 요한입니다(14). 셋째, 구약의 대언자들입니다(23,45). 넷째, 성령님이십니다(33-34). 다섯째, 안드레입니다(41). 여섯째, 빌립입니다(45). 일곱째, 나다나엘입니다(49). 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이 말씀은 창세기 1:1의 시작과 같습니다. “처음에...”(In the beginning). 그래서 이 두 권은 마귀들의 가장 강력한 공격을 받습니다. 창세기는 진화론자들에게 과학이란 이름으로 공격을 받았고, 빈약한 증거와 증명되지 않는 학설과 이론으로 교육 현장에서 사실처럼 가르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를 공격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서 이론가, 사본학자, 본문 비평학을 다루는 불신자들에게 심한 공격을 당하며 빈약한 자료와 이론으로 사실처럼 가르쳐 지고 있습니다.

말씀(Word)은 말씀들(words)의 주체입니다. 마치 성령(Spirit)이 있고 영들(spirits)이 있고, 하나님(God)이 있고 신들(gods)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Son)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sons)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Word)이신 고로 우리는 기록된 말씀(words)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들(words)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과 사상과 감정과 의지를 표현할 수 있듯이, 하나님은 말씀(Word)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계시를 드러내셨습니다. 말(단어)은 글자로 구성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계1:8,11, 21:6,22:13). 말씀으로 세상은 지어졌습니다(히11:3). 하나님의 말씀이신 분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 말씀이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말씀들은 같은 신격과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요한복음 1:1에서 말씀이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7절 역시 그렇습니다. [이는 하늘에 증거하시는 세 분이 계시기 때문이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5:7). 하지만 현대 역본들 가운데 이 구절이 있는 성경은 단 한 권도 없습니다.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이 이 본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원된 모든 사본들은 이 본문을 빼버렸습니다. 이는 그들이 삼위일체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들에게 얼굴을 상하시고 배반당하시고, 못 박히셨듯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역시 교회 내에서 배척되고, 상하고, 못 박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기보다 카이사를 외쳤듯이 오늘날 성도들은 킹제임스 성경보다는 NIV, NASV를 외칩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 주고자 했지만 민중들은 바라바를 외쳤듯이,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보다는 외경이 들어있는 카톨릭 사본을 달라고 외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느니라.](3).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세기 1:1, 골로새서 1:13-17, 히브리서 1:12절을 참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천지창조의 사역보다 더 큰 사역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혼들의 영을 살리는 새 창조 행위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복음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고 계십니다.

4절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피 속에 있습니다(레17:14).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피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피는 우리의 속죄를 위한 값으로 지불되었습니다(마26:28, 요일1:7). 그러나 그 피가 주님께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을 때 피가 없으셨습니다(눅24:39). 우리 역시 부활한 몸을 입을 때 주님과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인데, 그 때는 피가 없는 육체를 입을 것입니다. 영원 가운데서 우리가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인간은 누구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안에는 죽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일 뿐 죽음이 없습니다. 생명 자체란 말은 영원한 생명이란 뜻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5). 빛이 도달하는 곳에는 어둠이 사라집니다. 빛이 도달하면 그곳에는 열이 함께 전달되어 온기가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이 곳 지구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파이프 라인이 아니라 빛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오늘날 무선 통신 시대가 열리면서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한결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전송 자료들을 어떻게 전달합니까? 나에게 있는 원본을 어딘가에 수신 장치만 있다면 그대로 보낼 수 있습니다. 음성이든 사진이든 무슨 정보라도 그대로 전송됩니다. 지구 반대편의 소식도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여러분의 집에 있는 T.V는 매일 그런 역할을 합니다. 우리 안에 거듭난 영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그대로 전송됩니다. 수신 장치에만 문제가 없다면 전 세계의 모든 방송과 전파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주님이 비추시는 생명의 빛을 그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5). 빛이 없으면 우리의 육안은 사물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빛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으로 인해 죄와 더러움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내안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생명의 빛이 나에게 비치기 시작하면 자신의 본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본문은 빛의 부재에 기인한 문제가 아니라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눈의 문제요, 인식 능력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고쳐 주시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6).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주님이 사용한 위대한 사람들은 어떤 단체를 조직하거나 학교를 세웁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실 또 다른 사람을 찾기보다는 그들이 남겨놓은 단체, 조직, 학교 등을 운영하고 유지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 버립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가 바로 침례인 요한입니다. 요한의 임무는 빛에 대해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가 증거하러 왔으니 이것은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통해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라.](7-8). 이 땅에는 요한과 같이 증거하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믿게 하십니다. 전도는 매우 미련해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참 빛으로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느니라.](9). 세상에는 거짓 빛이 너무나 많습니다. 거짓 종교도 많습니다. 마귀 역시 빛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합니다. 이런 거짓 빛은 사람들에게 거짓 믿음, 거짓 소망을 심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빛이시며,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저 하늘로 가는 길을 걷게 됩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되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고](10). 요한 복음은 창세기만큼이나 창조주 하나님을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싫어합니다.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졌거나 진화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창조주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진리입니다.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고](10)란 말은 그들이 자신들을 비추는 참 빛을 받아 들이지 않은 결과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빛이 없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참 빛이신 분을 통해서만 빛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빛을 거부했기 때문에 소망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영접(迎接)하지 아니하였으나](11).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척을 받으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온 세상은 우상들이나 피조물들을 받아 들이는데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지만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는 못하는데, 이는 우리의 본성이 빛을 거부하는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과 달리 유대인들은 수천년 동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그들 안에도 역시 빛이 없었기 때문이요,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3:19을 보십시오.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분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12). 요한은 영접한다는 의미가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구원은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받아먹는 것만큼이나 쉽습니다. 초청장을 건네 줄 때 받는 것처럼 쉽습니다. 구원은 선물을 받는 것처럼 쉽습니다.

여기서 잠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욥기 38:7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실 때 기쁨으로 노래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1:2에서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음을 봅니다. 이는 창조의 상태가 미완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의 결과란 사실을 예레미야 4:23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환란 문맥인데 심판의 결과가 창세기 1:2의 모습과 같은 동일한 어구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때 창세기 1:2이 오늘날 근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창조의 처음 단계가 아니라 첫 창조의 심판으로 인한 결과란 사실을 봅니다. 창세기 1:2에서 시작된 재창조의 역사는 1:28에서 이 땅의 주인으로 아담이 세워졌고,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관리할 직분을 맡았습니다. 이렇게 되어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얻습니다(눅3:38).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나신 분이시니](골1:15).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그분께서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드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하지만 아담은 곧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란 지위 대신 영적으로는 마귀의 아들(요8:44, 요일3:10)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아담으로부터 이 땅의 왕좌를 찬탈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 백성들을 불러 내렸고, 이 땅에 자기 수하들을 늘려나갔는데 그 사건이 창세기 6장의 일입니다. 이전에 이 땅을 소유했던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 처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 사람의 딸들과 결혼함으로 땅은 폭력과 불법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창6:2). 이들의 결혼으로 태어난 아들들이 고대의 용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시고, 아담이 잃어버린 이 땅을 노아에게 이 땅을 주었습니다. 노아는 아담과 거의 동일한 명령을 받았습니다(창9:1,2). 하지만 노아 역시 술취함으로 범죄하고 그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음으로 하나님께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창12:1-3). 그리고 이삭, 야곱에게 그 지위를 계승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립니다. 호세아 1:10, [그러할지라도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아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또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리라.](호1:10). 하지만 이스라엘 역시 이 땅을 차지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이 분이 이 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오신 후로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를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심으로써 장차 그들이 이 땅을 통치하고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크리스천들이 마귀들의 공격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 때 그들이 소유했던 타이틀, 그들이 소유했던 이 땅의 지배권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노아에게 주신 명령과 동일한 명령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점점 더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아서 길러야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회복되어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것이며,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이 땅에서 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슥8:20-23, 계20:1-5, 벧후1:11).

우리는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왕국에 관련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에 눈을 떠야 합니다. 많은 독재자들이 유난히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약탈자들로서 주인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자신들이 이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도 이런 일은 얼마나 많이 자행됩니까? 정당한 유산 상속자를 죽여 버리고 자신들이 그 재산을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따위의 일은 매우 흔하게 발생합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죽이고, 우리가 받게 될 유산의 상속에 대해 무지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하나님의 상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새 역본들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을 지워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들(children)이라고 대체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런 약속들을 모조리 없애 버렸습니다. 새 역본들처럼 아들이란 단어를 자녀란 단어로 바꾸는 즉시 땅과 유업에 관련된 모든 약속들의 링크가 다 깨져 버리고 가려져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가졌다는 것은 여러분의 확실한 신분 증명서를 가진 것이며, 여러분이 받게될 상속의 유업이 무엇인지를 알고 소유한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니라.](13). '혈통으로나'란 말은 누구도 모태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모태신앙이란 말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혈통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육신의 뜻으로나’란 말은 사람의 행위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뜻으로나’란 말은 침례나 교회 회원이 되거나 어떤 종교 행사에 참여하거나 입문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태어난 자들만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만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명쾌한 구절이며, 그분의 신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딤전3:16)와 동일한 말씀입니다. 마귀는 이 구절을 가장 싫어하는 구절 가운데 한 구절로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변개시켰는데,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현대 역본들은 God(하나님) 대신 he(그)라고 바꾸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여자에게서 나시고, 성령에 의해 잉태되셨으며, 육신이 되셨습니다.

15절입니다. [요한이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며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서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라, 한 것이 이분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니라.](15). 누가복음 1:26에 따르면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6개월 정도 먼저 잉태되었고,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나 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라’고 증거함으로써 예수님이 영원전부터 계신 분이란 사실을 입증했습니다(미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미5:2).

16절입니다. [우리가 다 그분의 충만하심에서 받았으매 은혜 위에 은혜니]-약간 오역임. all을 목적어로 취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의 충만하심 가운데 받았으니 은혜 위에 은혜로다](직역)라고 해야 함. 주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며, 모든 것을 다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십니다. (고전1:26, 15:28, 엡1:23, 엡4:10,골 1:19, 2:3,9참조). 모든 영적인 복을 주님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받습니다. 모든 은사 역시 그렇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힘이든, 지혜든, 무엇이든지 다 그분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받았으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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