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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요한복음 3강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말씀: 요 1:17-41 
요절: 요 1:29

17절입니다.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라](17). 여기서 아주 선명하게 대조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율법과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며,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율법의 2대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과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란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옵니다. 진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은혜와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18절입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자(獨生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18).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전6:16). 요한 사도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독생자로서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골로새서 1:15,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나신 분이시니](골1:15). 하지만 현재 우리는 사도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마저 볼 수 없습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되느니라.](요일4:12).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독생자란 표현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란 말인데 하나님도 아들이 있는가?란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육체적으로 하나님께 태어난 분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신성을 가장 잘 나타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사9: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여 있고 그의 이름은 기묘라, 모사라, 강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임이라.](사9:6). 18절 말씀을 다시 주의해서 보시면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라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의 품속에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동시에 두곳에 계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소 부재는 요한복음 3:13에서 한번 더 나옵니다.

19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19). 요한은 ‘네가 누구냐?’란 질문을 받았는데 요한의 사역이 워낙 출중하여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엘리야, 그리스도, 그 대언자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주님은 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낳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자라고 불렀습니다(마11:11). 질문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더니 그가 부인하지 아니하며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매](20).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었으면 바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일지 모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공개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나는...아니라.’ 이것은 위대한 고백입니다. 사람들은 약간만 주목을 받으면 자신이 위대한 종이니 사도니 하다가 결국은 ‘내가 그니라’하고 맙니다. [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라.](갈6:3).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질문은 계속됩니다. [그들이 또 그에게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매 또 /묻되/, 그러면 네가 그 대언자(代言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아니라, 하거늘](21). 질문은 더욱 놀랍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사람으로 온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메시야라면 예전에 헤롯의 궁전에 들렀던 박사들의 기사를 통해 요한의 나이 정도가 되었을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때 탄생한 메시야가 등장했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라기 4:5에 따라 그 메시야가 아니라면 메시야의 등장에 앞서 올 엘리야를 염두에 두고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알았지만 성경에 따라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 성경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했는데 주님은 요한을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성경을 배우는 성도들의 마음은 사정없이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그분보다 앞서 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예비된 한 백성을 준비하리라.](눅1:17). 실제로 요한은 엘리야의 영으로 왔지만 엘리야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엘리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14에서 주님은 [만일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11: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침례인 요한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했다면 구약의 예언은 교회 시대의 간격없이 그대로 성취되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0:5, 12:18, 12:21의 이방인에 대한 말씀의 변화를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11장에서 ‘만일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하면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강력하게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받지 않았고, 주님은 이방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마태복음 17:11,12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참으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다 그에게 행하였도다. 사람의 아들도 그와 같이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리라, 하시니](마17:11-12).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엘리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그는 분명 엘리야였습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환생이나 부활이 아니라 엘리야의 영으로 왔기 때문에 엘리야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엘리야를 배척하고, 헤롯은 그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요한은 예언대로 모든 것을 회복하지 못했고, 주님은 메시야로서 왕국을 세우지 못하셨습니다. 이제 이 예언은 다시 재림의 주님에 맞추어지게 됩니다.

22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 자신을 가리켜 누구라 하느냐? 하니](22).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질문에 온유함으로 답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바른 대답을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골로새서 4:6,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가 있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바를 알게 되리라.](골4:6).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벧전3:15). 요한은 그들의 집요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나는 대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하니라.](23). 요한은 자신의 직무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한 요한의 답변은 메시야의 도래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알고 있었습니다.

24-25절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이더니 그들이 또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대언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浸禮)를 주느냐? 하매](24-5).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관습에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아예 침례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이 하는 말의 요점은 무슨 자격으로, 무슨 근거로 율법에도 관습에도 없는 백성들에게 물로 침례를 주는 이상한 짓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침례는 메시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물 침례를 받으셨고, 물 침례를 주도록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26절입니다.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너희 가운데 서 계시니 곧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라.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26-27). 침례인 요한은 아직 메시야를 만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는 메시야의 등장을 알고 있었고,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자신이 아닌 메시야에게 눈길을 돌리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29절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29). 이 구절은 창세기 22:8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모리아 산은 후에 성전이 들어선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그곳이 바로 솔로몬의 성전의 어린 양을 잡는 곳이 되었습니다(대하3:1). 창세기 22:7-8을 보십시오. 이삭은 아버지에게 번제용 어린 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어린 양으로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진리는 킹제임스 성경에만 계시되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the lamb)이 아닌 숫 양(a ram)을 준비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말이 예언적 의미가 있음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세상 죄를 제거하는 - 구약의 양들은 결코 죄를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출34:7). 주님은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그것은 항상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제거하는 어린 양이 올 때까지 임시적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히10:4). 하지만 주님은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완벽하게 제거하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으니 그분께서 나보다 앞서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라, 한 것이 이분을 가리키는 것이라](30). 요한은 분명 예수님보다 6개월이나 먼저 태어났지만 주님이 자신보다 먼저 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가서 5:2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믹5:2). 31절은 자신이 왜 물로 침례를 주는지 목적과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분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려 함이라, 하니라.](31).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물로 침례를 줌으로서 온 이스라엘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모았고, 자신에게 모인 눈길을 다시 주님께로 향하도록 자신의 입술로 증거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을 드러내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추구하는 삶은 비참해지지만 자아를 낮추고, 숨기는 삶은 언제나 높임을 받습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는데 이 침례는 오늘날 성도들이 받는 물침례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요한의 침례는 구원의 침례가 아닙니다. 요한의 침례는 구원받은 후에 신앙 고백으로서 행해지는 침례가 아니라 구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침례였습니다. 요한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예수를 알지 못했고, 아직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18:25,19:3에는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었던 한 무리가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후에야 온전해졌습니다.

요한의 침례는 회개의 침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받는 물 침례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고백입니다.

32절입니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그분 위에 머물렀더라.](32). 비둘기는 노아의 방주에서 땅에 홍수가 가득할 때 내 보내어서 물이 내려갔는지를 알아 보았습니다. 이때 비둘기는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노아 역시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마음 속에 있던 비둘기는 수 세기가 지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비로소 쉴 곳을 찾고, 그곳에 내려앉았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순결을 상징하고 교회를 상징합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이용해 먹는 로고이기도 합니다.

33절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고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성/령이 내려와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바로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인 줄 알라, 하셨기에](33). 요한은 자신의 침례가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임을 말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성령 침례는 흔히 오순절, 은사주의 교회에서 거듭남과는 별개로 받는 특이한 체험이나 은사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없는 소리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었을 때 방언도 예언도 할 줄 몰랐고,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솟지도 않았고, 머리에는 후광이 그려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성령 침례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으로 성령 침례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하여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요, 곧 /한 성령에 의하여/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전12:13).

34절입니다. [내가 보고 이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34). 요한은 성령게서 머무는 것을 보고 즉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고 믿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의 소임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증거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5-37절은 요한이 맺은 사역의 열매입니다. 요한은 다시 한번 예수님을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증거했고, 요한의 제자들이 그 증거를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증거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기에 충분한 증거였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제자를 남에게 주는 것이나 빼앗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의무임을 알았습니다.

38절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그들이 따르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랍비여, 어디에 거하시나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님이라.)](38).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물었습니다. 주님은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들에게 먼저 이것을 묻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요한의 제자들은 즉히 ‘랍비여, 어디에 거하시나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이는 제자가 찾아가서 머물면서 배우겠다는 뜻입니다. 즉 제자가 되겠다는 청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39절,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와 보라, 하시더라. 이에 그들이 가서 그분께서 거하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머무르니 이는 때가 열 시쯤 되었음이라.](39). 이 둘의 이름이 사도 요한과 안드레입니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40-41절입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더라. 그가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이르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니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40-41). 우리는 구약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형제가 가인과 아벨이란 사실을 봅니다. 이 둘은 형제였고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지만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신약 성경에 처음 나오는 형제는 안드레와 베드로입니다. 안드레는 형제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거했고, 그를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이 둘의 선명한 대조는 언제나 우리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육신의 형제 자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주님을 증거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가인과 아벨과 같은 형제냐?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형제냐? 안드레는 이날 전도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한 인물을 세우게 됩니다.

복음을 전한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후에 저 하늘에 갔을 때 내가 전한 형제를 만난다면 그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런 일이겠습니까?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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