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요한일서2:1-11

요절:


2:1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범죄하여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 일서에는 어린 자녀들(1,12), 젊은이들(13),
아버지들(13)이 나옵니다. 이는 영적 성장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갓 복음을 듣고 거듭나면 갓난 아이가 됩니다. 이때 순수한 말씀의 젖을 잘
먹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어린 아이가 되는데 가장 모방심이 뛰어나고 분별없이 행동하기 때문에 올바른 성경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요한은
어린 자녀들에게 이 글을 기록한 목적이 “범죄하지 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범죄는
아들됨을 무효화시키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단절하게 만들며, 사람들에게 간증을 잃어 버리게 만들며, 형제들간에 불화를 이루게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를 악용하거나 오용한다면 그는 영적인 기쁨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유업의 상을 잃어 버리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사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죄를 이기고 육신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면 성령의 열매를 많이, 더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의인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이 있습니다. 죄에 빠진다 해도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요일1:9). 그리고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마음을 돌이켜 행동의 변화까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을 기초로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 (자백-->회개--->심판). 요한은 우리가 범죄하여도 우리에게는 변호자가
계시다고 합니다. 범죄한 죄인이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유능한 변호사입니다. 자기를 위해 아무도 변론해 줄 사람이 없고, 유리한 말 한마디 증언
해 줄 사람이 없다면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마귀는 검사입니다. 그는 성도들을 밤낮 고소합니다. 계시록 12:10에는
마귀를 가리켜 “우리 형제를 밤낮 고소하던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의로운 욥조차 고소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마귀를 대적해서 승소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욥기 9:32에 욥은 자신의 중재자가 없음을 한탄했습니다. [그분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분께 대답할
수도 없으며 우리가 함께 재판을 받으로 갈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는 우리 둘 위에 손을 얹을 중재인도 없도다.]
(욥9:32)


그러나 저와 여러분에게는 바로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걸출한 변호인이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말로만 변호하실 뿐 아니라 나의 지은 모든 범죄에 대해서 자신이 몸소 변제하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라.]


성경에는 다양한 헌물이 나오는데 그 중 화해 헌물이란 손해 본
당사자에게 헌물을 드림으로써 그 손해 입은 것에 대해 마음을 풀게 하는 헌물이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화해 헌물로 드림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을 누그러 뜨리시고 마음을 다 풀게 하셨습니다. 죄를 차마 보지 못하시며 죄인을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모든 진노를 거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 대해서 더 이상 진노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이
구절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란 말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선택한, 또는 예정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피는 특정인만을 위한 제한 속죄가 아니라 보편 속죄입니다. 장로교에서 가르치는 구원 예정이나 제한 속죄설은 이
구절을 정면으로 거스리는 악한 교리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지 자신이 택한 사람만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는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심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 그분께서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셨으니 이는 정하신 대에 증거되기 위함이라.]
(딤전2:4-6)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분을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이로써 우리가 그분을 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아노니, 만약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면
그러하니라.-직역)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시급히,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을 확실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여러분의 구원은
헛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믿음의 말씀을 들을 때 주어지는 계시를 통해서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를 알게 한 것은 혈과 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분명히 일러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세상 지혜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만약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면 더욱 확실히 주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을 때 주님을 알게 되고, 그 말씀을 지킬 때 더욱
분명하게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주의 명령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약속도 있고, 교훈도 있지만 명령이 가장 많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2에서 [이는 우리가 주 예수님을 힘입어 너희에게 무슨 명령들을 주었는지 너희가 앎이니라.]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명령들이 있습니다. 명령이라고 하면 지키기에 너무 어렵고 힘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멍에는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주님은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요한 사도도 말하기를 [그분의 명령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문제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명령을 행할 때 그 유익이 무엇입니까?


첫째, 이 명령들을 행할 때 주님을 친구처럼 알게 됩니다.
[내가 명령한대로 행하면 너희가 나의 친구라]
(요15:14)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주의 명령을 행했을 때 “하나님의 친구”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둘째, 주의 명령을 행할 때 주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내가 아버지의 명령들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명령들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거하리라.](요15:10)


셋째, 위의 본문에서 처럼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을 더 확실히
알게 됩니다.(요일2:3. we do know...에서 강조의 do가 번역되지 않았음.)


넷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완전하게 됩니다.(요일2:5)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완전하게 되나니...]
다섯째, 환란 성도들의 경우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갖습니다(계22:14)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분을 아노라 말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a liar), 그(the) 진리가 그 (사람) 속에 있지 아니하되]


4,6,9절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
마음으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거나 주워들은 풍월로 “예수의 피가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속했다면 나의 죄도 속했겠네!”
하면서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주변에는 이외로 예수님을 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첫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입니다. “어디에 사는 누구든지
회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을 아노라하고 복음의 믿음에 순종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어떤 명령들을 지켰다해도 결국 주님의
명령들을 한 가지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이 추운 겨울에 부의 공평한 분배와 경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발로 뛰는 것이 주님의 지상 명령인 줄
알고 설치는 기독 청년회, 기독교 윤리 실천회, YMCA, YWCA, 국제 라이온스 클럽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노라 외치지만 회개하고 복음을 믿지
않는다면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간에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들 안에 진리는 없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그 분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완전하게 되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성경의 수많은 말씀 가운데 단 한마디의 말씀을 지키면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킬 것이요](요14:23)라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지나가는
농담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말할 때마다 잊어 버리고, 싹 무시해 버리고, 대들면 그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증거는 그 사람의 말을 지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요한서신에는 믿는다는 말보다 안다는 말이 더 많이 나옵니다. 바울
서신에도 ‘우리가 알거니와’란 표현이 많습니다. 안다는 말은 피상적인 인식이니 자각이 아니라 상호간의 깊은 친교에서 나오는 앎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성경을 갓 배운 초신자라 해도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고린도후서5:17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고후5:17) 그러나,
이 사실을 믿음의 단계를 넘어서 알고 싶으신 분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십시오. 완전하게 된다는 말은 점진적인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점점 더 알아 나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이외에도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것들이 너희 안에 있어 풍성한즉 너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빈약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2:5-8)


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분께서 걸으신 것같이 자기도 그렇게 걸을지니라.]
자, 이제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강력한 도전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들을 누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분께서 걸으신 것같이” 성경에서 “같이,
처럼”이란 말은 항상 부담스럽습니다. “주의 온전하심 같이”, “주의 거룩하심같이”, “그분의 사랑하심 같이”, “그분께서 행하신 것같이”,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같이”,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란 말에 즐거이 아멘!을 연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외로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명쾌하고 쉬운 답을 제공해
줍니다. 요한일서 4:15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고 또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게 됨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이는 그분께서 어떠하신 것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함이니라.]
(요일4:15-17)


우리는 주님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주님의 모습대로 밖으로 표출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거룩하심을 밖으로 드러내고, 우리 안에 거하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과
신실함과 은혜와 순결함과 완전함을 밖으로 표출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걸으신 것같이 자기도 그렇게 걸을지니라의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의 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걸으신 그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정말 주님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그 주님을 밖으로 표출하는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미 성숙해서 가지에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고 있다면 내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로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증거 10 가지


① 그리스도께서 걷는 것처럼 걸으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6)


② 형제를 사랑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10;
3:14-15)


③ 하나님이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14)


④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17)


⑤ 처음부터 들은 것을 내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24)


⑥ 기름부음이 내안에 거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27)


⑦ 범죄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3:6)


⑧ 명령들을 지키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3:24)


⑨ 성령이 내주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3:24)


⑩ 열매를 맺으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요15:4,7)


7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요, 너희가 처음부터 가졌던 옛 명령을 쓰노니 이 옛 명령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그 말씀이거니와]


새 명령이란 것은 어떤 새로운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듣고,
사도들에게 듣고, 지금 또 듣는 명령이란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신약에 처음 나오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구약에 나오는
명령입니다. 정말 새 명령이 있다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라.”- 이것이 정말 처음 나오는 새로운 명령일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명령을
쓰노니 이것은 그분에게와 너희에게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이제 참 빛이 비침이니라.]


8-11절까지는 형제애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주님은 특히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 간의 형제 사랑에 대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형제란 개념은 같은 육신적인 유대인 동족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신약에서 형제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매개로 한
영적인 가족들을 말합니다. 새 계명은 바로 이 영적 형제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빛되신 주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어둠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세상은 다시 흑암으로 가득찼습니다. 이 세상은 현재 흑암이 가득한 밤이지만 성도들은 빛의 자녀요, 세상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교회야말로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어 주는 등불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다시 한번 나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사실 주님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는 주님께서 귀한 피를 흘려 사신 귀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주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키워 본 부모님들은 이 구절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계속해서 싸우면 그 형제들은 결코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기 형제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와 답답함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 안에 빛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전혀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 없으나]
stumbling stone- 실족케 하는 돌.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자도
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양심 가운데 자기를 정죄할 것이 없으며 담대함을 입을 수 있다.




결론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걸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신약적 개념으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다. 살인은
마귀의 속성이다. 아벨을 죽인 카인을 보라. 야곱을 죽이려 했던 에서를 보라. 그들 안에 빛이 있었던가? 요셉을 죽이려했던 형제들은 어둠 가운데
있었다. 특히 예수를 로마의 손에 넘겨 준 유대인들은 완전한 흑암 가운데 있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잘 아십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주님 안에 거합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주님의 빛 안에서 걷고 있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혹시 형제를 미워하면서도 빛 가운데 거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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