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말씀: 요 4:35-54 요절: 요 4:35

한 영혼을 구원하신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향해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희게 되어 추수하게 되었도다.](35). 유월절이 막 끝난 시점이니까 농사철로 하자면 아직 4개월이 지나야 수확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말씀은 영적인 수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밭이라고 하셨고, 전도자를 일꾼으로, 세상 영혼들을 거두어 들여야 할 곡식으로 보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밭은 이미 누렇게 황금의 물결이 출렁이는 수확의 계절이 아니라 이미 수확의 계절을 넘어 서고 있었습니다. 밭은 황금색에서 흰 색으로 바뀌었습니다. 희게 되었다는 것은 지금 거두지 못하면 쓰러져 버리고, 거두지 못하게 됨을 말합니다. 희게 되었다는 것은 추수의 시급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밭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무도 거둘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밭에 수확물은 있는데 거둘 일꾼이 없습니다. [이러므로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시는 {주}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자신의 추수 밭에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하라.](눅10:2). 일꾼이 너무나 적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저녁이 되면 삯을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밭은 사도들이 거두어들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3천명이 구원받고(행2:41), 5천명이 구원받고(행4:4),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다(행5:41). 침례인 요한이 뿌린 씨앗을 주님이 거두어 들이시고, 제자들에게 거두어 들이도록 전도 여행을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3년 반 동안 뿌린 씨는 오순절을 기점으로 거두어 들이시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선교 현장에서 하는 일은 누군가 뿌리고, 누군가 물을 주고, 누군가 거두어 들이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거두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뿌리기도 해야 합니다. 전도를 나가는 것은 거두러 나가는 일이 아니라 뿌리러 나가는 일이며, 물주러 나가는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누군가 다음에 거두어 들일 수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자와 물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기 때문이라.] (고전3:6~9). 사도 바울은 거두는 일보다 뿌리는 일을 더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뿌리는 일은 거두는 일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청주에 성경대로 믿는 성도 가운데 한 분은 전도지를 무려 10만장 이상 뿌렸지만 몇 년 동안 단 한명도 거두어 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회의 어떤 형제가 열매도 없는 일을 왜 하느냐? 당신은 부름받지 않았다. 매일 뿌리는데 왜 한 명도 없는가? 하며 비난을 했습니다. 그 형제는 거두어 들이는 일만을 전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뿌린 씨앗을 자신이 거두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거두는 자에게 영광을 돌리며, 거두는 자가 영적인 사람이며, 열매많은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사람(2차 전도자)은 별 것 아닌 것 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거두어 들이기만 하려고 애를 씁니다. 몇 명을 전도했다. 몇 명을 구령했다는 간증은 많이 있지만 몇 명에게 씨를 뿌렸는가?에 대한 간증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사람을 데려 오는 일에는 기뻐하지만 씨를 뿌리는 일에는 매우 소극적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바람을 살피는 자는 씨를 뿌리지 못할 것이요, 구름들을 주목하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로다.](전11:4), [/너는/ 아침에 네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네 손을 금하지 말라. 그 까닭은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은 그 둘 다 똑같이 좋을는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전11:6). 씨를 뿌리지 않으면 누구도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씨를 뿌리고 손을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데는 계절이 없습니다. 주님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in season and out of season), 씨를 뿌리라고 하십니다. 씨를 많이 많이 뿌려 두면 때가 되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씨를 뿌리시기 바랍니다. 확신을 가지고 뿌리십시오. 내가 뿌리면 누가 와서 한 번 더 전하게 되고(물을 준다), 후에 열매가 맺히면 누가 거두어 들일 것입니다. 현 시대는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이 반복되는 시대입니다. 밭은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으니 들에 가서 추수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추수할 것은 거두어 들이고, 또 뿌려야 합니다. 이 진리는 오늘날 근본주의 교회들에서 좀 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36-37절입니다. [거두는 자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것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같이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참되도다.](36-37). 밭에 나가서 일을 하면 주인은 당연히 삯을 줍니다. 마태복음 20:1-6에는 주님이 어떻게 일한 삯을 지불하시는가?에 대한 원칙이 나와 있습니다. 주님이 부르셔서 일하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일당을 다 받습니다. 주급제, 월급제가 아니라 일당제입니다. 오후 3시에 들어가서 일하기만 해도 하루 일당을 주십니다. 문제는 일하러 가는가? 가지 않는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주 3일만 일하면 3일만 삯을 받을 수있습니다. 오늘 당장 일하러 나가십시오. 주님은 오늘 오후 3시에 내가 전도지를 한 장 뿌리거나 누구에게 말씀의 씨를 뿌린 것도 일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5시에라도 나가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에게 일한 삯을 계산해 주십니다. 해가 지기 전에 무조건 나가십시오. 여러분들이 몇 일간 일했는가? 주님은 날 수를 세십니다. 주님은 매일 매일 날 수를 세시는 분이시며, 날 수대로 삯을 지불하시는 분이십니다. 몇 해 전에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매일 피우던 담배를 끊고 25년간 매일 그 돈을 모았습니다. 후에 마시던 커피를 끊고 그 돈은 은행에 저금했습니다. 25년 후에 그가 은행에서 찾은 돈은 무려 10만불이 넘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구령을 위해 기도하고, 구령을 위해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구령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면 주님으로부터 그 삯을 받을 것입니다.

저 하늘에서 우리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할 텐데 이는 뿌리는 자에게 주님이 동일하게 삯을 지불하시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의 발을 그리로 보내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32:20). 주님은 씨를 뿌리는 자를 거두는 자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부지런히 씨를 뿌립시다. 주님은 열매를 주십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거기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움이 돋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씨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고 먹는 자에게 빵을 주는 것같이](사55:10). 저와 여러분이 기도의 씨를 뿌리고, 말씀의 씨를 뿌리고, 섬김의 씨를 뿌리고, 사랑의 씨를 뿌릴 때 주님은 비와 눈을 내리시고 땅을 적셔서 움이 돋게 하시고 싹이 나게 하십니다. 만약 아무 씨도 없는 곳에 주님이 비를 내려 주셔도 움이나고 싹이 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뿌려할 씨앗 대신 불화의 씨앗을 뿌리고(잠6:14,19), 다툼의 씨를 뿌린다면(잠16:28) 그 역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 수확의 법칙입니다. [자기 육신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갈6:8). 무엇을 심든지 심는대로 거두는 것은 자연 법칙이며, 영적 법칙입니다. 악의 씨앗도 심는 사람이 있고 거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데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마치 한 말의 씨를 들고 나가서 엉뚱한데다 다 쏟아 부어 놓고, 뿌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씨는 뿌릴 곳에 뿌려야 합니다. [[주]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렘4:3). 또 성경은 말합니다. [씨를 뿌리려고 쟁기질하는 자가 하루종일 쟁기질만 하겠느냐? 자기 땅의 흙덩어리를 캐내어 부수기만 하겠느냐? 그가 지면을 평평하게 하였으면 완두를 뿌리고 근채를 뿌리며 으뜸가는 밀과 미리 정한 보리와 호밀을 뿌릴 곳에 뿌리지 아니하겠느냐? 이는 그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교훈을 주사 분별하게 하시며 또 가르치셨음이라.](사28:25~26).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셔서 뿌려야 할 곳에 씨를 뿌리고 때로는 땅을 갈아서 쟁기질을 한 후에 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뿌리는 자는 고생만 하는 것 같지만 수확하는 자는 풍성하게 거두어 들이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로 거두며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 이는 지금이 곧 [주]를 찾을 때이기 때문이라. 마침내 그분께서 오사 의를 비같이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3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나니 다른 사람들은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수고에 참여하였느니라.](38). 주님은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도시마다 보내셔서 거두게 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수고한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어 수고한 것들을 거두게 한 것입니다.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수고한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짓지 아니한 도시들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올리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수24:13). 이는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누구를 구령했다고 하면 여러분이 전도를 잘 해서 구령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그를 위해 기도한 사람이 있고, 적게는 수년 많게는 수십년전부터 누군가 끊임없이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준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씨를 뿌리는, 물 주는 자가 다 하나이며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심는 자와 물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니](고전3:8). 거두는 자는 이들의 수고에 참여한 자에 불과합니다.

39절입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일을 그분께서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도시의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분을 믿더라.](39). 여자의 증거는 매우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이 자신이 행한 일을 모두 말했다는 사실로 인해 메시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체험한 이야기를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시며, 남의 구원자가 아니라 나의 구원자입니다. 구령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난 변화, 내 안에 이루신 주님의 손길을 증거하면 됩니다. 2000년 전 십자가의 피에 대한 증거도 증거지만 그 피가 내 안에 있는 죄를 어떻게 씻었으며, 나를 어떻게 구원했는지 증거하면 됩니다. 복음 증거는 위대한 사람만의 사역이 아니며, 하나님은 경건하고 지위가 높고 학식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증거자인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고 믿음을 지닌 사람이 증거의 자격이 있고, 증거의 능력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여자의 증거로 인해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씨를 뿌렸습니다. 주님은 거두셨습니다.

40절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분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간청하니 그분께서 거기에 이틀을 머무르시매](40).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왔을 뿐 아니라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이는 놀라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족속이라고 믿었지만 그들은 주님께 나아왔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간청했습니다. 주님은 거기서 이틀을 머무셨는데 이틀은 이방인의 때 2000년, 즉 교회 시대 2000년을 예표합니다. 호세아는 말하기를, [이틀 후면 그분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셋째 날에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리니 우리가 그분의 눈앞에서 살리로다.](호6:2)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셋째 날 즉 천년 왕국 때에 일으켜 세워 집니다. 지금은 교회사 2000년이 마감되고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르는 그런 때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식 역시 셋째 날에 열렸습니다. 신부인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식 역시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이틀 후, 셋째 날이란 표현은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41-42절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인해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들이 그 여자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줄 알기 때문이라, 하였더라.](41-42).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표적도 은사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놀라운 기적을 보거나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인심이란 것을 봅니다. 이들은 분명히 여자를 통해 왔고, 믿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여자로 인해 믿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창녀가 전해준 말로 믿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예를 많이 보았습니다. 자기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사람이 좀 더 영적이고, 성경적이고, 인격자이고, 훌륭한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전해주면 믿고 나서도 애써 무시합니다. 자기는 설교를 듣고, 아니면 혼자 성경을 읽다가 스스로 깨우쳤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전하는 사람은 존경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43절입니다. [이제 이틀 뒤에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들어가시니](43). 이틀 후는 교회사 2000년 시간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갈릴리로 가셨듯이 2,000년이 지난 후에 유대인들에게로 오십니다. 처음에 주님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이후에 오실 때는 영접합니다.

44절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증거하시기를, 대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아무 존경도 받지 못한다, 하셨음이라.](44).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슬픈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해 위대한 사역을 여러 곳에서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고향으로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평생 고향에 가지 않는 분이 계셨는데 자기 고향에서는 자신이 목사라는 사실을 두고 모두 웃는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워낙 사고를 많이 친데다 놈팽이 생활을 했던지라 후에 변화되고, 목사가 되고, 명성이 자자하지만 자기 고향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역시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 있는 일들이 어디에서 났느냐?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그의 동생들은 야고보와 요세와 시몬과 유다라 하지 아니하냐? 그의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났느냐? 하고 그분으로 인해 실족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대언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13:54~57).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 이상으로는 결코 보지 않으려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역을 보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아는 예수님은 육신의 예수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45절입니다. [그때에 그분께서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 사람들이 그분을 영접하니 이는 그들도 명절에 갔다가 그분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45).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란 말씀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그들은 주님을 낭떨어지로 밀어서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행한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달리 들어서 믿은 것이 아니라 보아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대환란이 끝나면 이런 일은 한번 더 발생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표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합니다(고전1:21). [이에 유대인들이 응답하여 예수님께 이르되, 네가 이런 일들을 행하니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이겠느냐? 하매](요2:18). [그러므로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이사 우리로 하여금 보고 선생님의 말을 믿게 하시겠나이까? 선생님이 행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요6:30). 이들은 계속해서 줄기차게 표적을 요구하며, 표적을 통해서만 믿으려 합니다.

4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오시니 이곳은 전에 물로 포도즙을 만드신 곳이라. 거기에 어떤 귀족이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46). 이제 요한은 갈릴리에서 행한 두번째 표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의 한 귀족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가버나움에서 병이 들었습니다. 아들의 질병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약을 먹이고 병원에 가는 이상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진단이라도 나오는 때면 사람은 속수무책(束手無策)입니다. 이 귀족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을 것이며, 니고데모와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선생 정도로는 믿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7절입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 함을 듣고 그분께 가서 간청하되, 내려오사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이는 그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7). 아들을 위하여 20 마일 정도의 거리를 달려와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내려오사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주님을 찾았고,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백부장과 같은 큰 믿음은 없었습니다. 백부장은 올 필요없이 그 자리에서 말씀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반면 귀족은 내려와서 고쳐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백부장은 주님을 주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기에 아무데서나 능력을 행하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반면 귀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오실 메시야라면 고칠 수 있을 것이요, 고친다면 그렇게 믿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즉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8절,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아니하는도다.](48). 예수님을 믿고 구하는 것과 표적과 이적을 보고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이 어디서 표적을 행했다고 하면 그 사실로 족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보지 못했으니 여기서도 표적을 보여 달라고 구하고, 보여 준 후에는 또 보여 달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표적은 믿음을 주지 않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후5:7). 믿음의 선지들이 좋은 평판(good report)을 받은 것은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었기 때문이요, 보는 것으로 걷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9절입니다. [그 귀족이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니](49). 귀족은 주님이 빨리 오셔서 고치지 않으면 아이가 죽고, 죽고 나면 주님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니고데모처럼 주님은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은 후에는 오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죽은 후에는 선생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란 말이 내면에 그대로 깔려 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칠 수는 있지만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다고 믿는 것이 믿음의 한계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깊은 친교를 가졌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다의 일성을 들어 보십시오. [그때에 마르다가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21). 마리아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그분을 뵈옵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11:32). 이 말에 주님은 영으로 신음하시고 괴로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신성을 제한 해 버리고, 죽음 이전에만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 단정해 버리는 그들에 대해서 주님은 통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고 이르시되,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와서 보시옵소서, 하매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요11:33~35). 이렇게 우시는 주님을 본 유대인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중의 어떤 이들은 이르되, 눈먼 자의 눈을 열어 준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요11:37). 사람들은 아무도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쑥덕거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사고력은 마비되며,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폐하러 오신 분이며, 부활의 주님이시란 사실을 아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5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네 길을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매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 예수님은 그냥 돌려 보내시며, “네 길을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셨습니다. 귀족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아니 집에 가 보지도 않으시고....아니 손도 얹어 주시지 않으시고... 등과 같이 투덜대지 않았습니다. 올 때는 다급하게 왔지만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자기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하면서 정작 주님이 응답해 주시면 응답 방식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투덜대고 불평하며 그냥 떠나 버립니다. 주님은 손을 얹어서 고칠 수도 있으시고, 말씀만으로도 고칠 수 있으시며, 가서 고쳐 주실 수도 있으시고, 안 가시고 그 자리에서 말씀하심으로 고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와서 안수를 해 달라고 하거나 기도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족은 이 점에서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구하고, 요청했지만 자기 방식대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쳐 달라고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의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이에 나아만이 자기의 말들과 병거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使者)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되, 가서 요르단 /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네 살이 다시 나와 네가 깨끗하리라, 하니라. 그러나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보라, 내 생각에는 그가 분명히 내게로 나아와 서서 [주] 자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대고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마스커스의 아바나와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의 모든 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노하며 떠나가니](왕하5:9-13).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신이 요청하는대로 문둥병을 고치는 방법을 일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생각한 방식대로 고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는 엘리사가 제시한 방법을 거부하고 그냥 가려 했습니다. 그 때 종들이 말했습니다. [그의 종들이 가까이 나아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대언자가 주인에게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라면 행하시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그가 주인에게 말하기를, 몸을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이에 나아만이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르단 /강/ 속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다시 나와 어린아이의 살같이 되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5:9~14). 결국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병이 낫는 체험을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들고 나오기는 하지만 해결 방법을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대신 자신이 정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님이 주신 해결 방법을 거부한 채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식으로 달라고 어거지를 부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반드시 회개해야 할 죄악입니다.

51절입니다. [이제 내려가던 도중에 그의 종들이 그를 만나서 이르기를, 당신의 아들이 살아 있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가 낫기 시작한 시각을 물은즉 그들이 말하되, 어제 일곱 시에 열병이 떠났나이다, 하매](51-52). 귀족은 주님이 말씀하자마자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일곱 시”가 아니라 “어제 일곱 시”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귀족은 주님이 말씀하신 후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거기에 하루를 더 머물렀습니다. 가버나움과 가나는 20마일 정도의 거리이며 4-5시간 정도의 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시각이 바로 어제 일곱 시였다는 것입니다. 일곱시면 오후 1시인데 부지런히 갔으면 오후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각이었지만 귀족은 가지 않고 그대로 하루를 머물렀다가 그 다음 날 집으로 내려 가는 도중에 종들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당신의 아들이 살아 있나이다”고 보고했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귀족의 궁금증은 나았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 나았느냐?”는 것입니다. 귀족은 주님의 말씀의 능력이 언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우리는 수 많은 믿음의 간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죠지 뮬러의 전기가 아니더라도 신실한 주의 종들 중에 이런 간증이 없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추상적이고 허구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을 추상적이고 허구적인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있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며, 성경의 기록으로 족하며 안심하고 하루를 더 머무를 수 있는 믿음입니다. 저는 질병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병을 모두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침을 받기를 원한다면 어렵지 않게 나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약으로도 낫지 않고, 병원에서도 낫지 않는 병이라면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마귀가 주는 병이 아닌가? 의심해 보십시오. 영적인 문제로 인해 생긴 병이라면 약도 의사도 필요없습니다. 주님께 기도하고 마귀를 대적하면 됩니다. 교회 성장학으로 이름을 떨친 풀러 신학교의 한 교수는 자신이 만성 편두통으로 오랫동안 고생했습니다. 약을 먹고 병원에 가지만 항상 재발하는 문제로 인해 고통하다 이것이 마귀가 주는 병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마귀에게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는데다, 자기 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비웃음을 당할 것 같아 샤워실에서 물을 크게 틀어놓고 샤워를 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안에 두통을 일으키는 마귀야 물러가라!” 하며 대적했습니다. 그는 샤워를 마치기도 전에 두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말 그대로 실제적인 믿음으로 말씀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믿음을 지니시기를 간구합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허구가 아닙니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씀을 기초로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통로입니다.

53-54절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시각인 줄 알고 그와 그 온 집안이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뒤에 행하신 두번째 기적이니라](53-54). 주님은 자신에게 무엇을 구하러 나온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며, 믿은 사람에게 결코 빈 손으로 돌려 보내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셨으며, 찾는 자마다 찾게 하셨고,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로우신 주님의 손길입니다. 귀족은 자신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그 일로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된 가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