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요한이서1-13 
요절 8
“너희 자신을 살필지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룬 것들을 잃지 아니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이서는 요한일서가 씌여진 다음 바로 씌여진 개인 서신입니다. 주후 90년 경에 에베소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며, 그리스도 안의 한 부인과 그 자녀들에게 썼습니다. 이 편지에는 속이는 자에 대한 분별법과 그에 대한 처신을 다루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장로는 택하심을 받은 부인과 그녀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라. 내가 진리 안에서 너희를 사랑하며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함은]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일컫습니다. 장로란 나이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장로 교회에서 말하는 장노(長老)가 아닙니다. 베드로도 자신을 일컬어 장로(長老)라고 했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5:1) 바로 뒤이어서 장로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밝혀 놓았습니다. 벧전5:2을 보십시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기꺼운 마음으로 하며...] 베드로가 말하는 장로는 지역 교회의 목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나이든 자로 묘사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또한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갇힌 자가 되어](몬1:9)

[택하심을 받은 부인과 그의 자녀들]은 요한 사도가 알고 지낸 어떤 그리스도인을 지칭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상징하는 예표라고 주장하지만 있는 그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택하심을 받은]이란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다음 4 가지에 대해서 선택 교리를 지지합니다.

1. 그리스도(사42:1, 벧전2:6) 2. 모든 그리스도인들(롬8:33, 골3:12) 3. 이스라엘(사45:4, 65:9,22; 벧전1:2) 4. 천사들(딤전5:21)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누구나 구원하시기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은 절대 진리입니다. 예정과 선택 교리는 여기까지입니다. 개개인을 선택해 놓았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택하신 자들입니다.

[내가 진리 안에서 너희를 사랑하며] 이것이 기독교식 사랑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진리가 없는 사랑은 맹목이며, 사랑이 없는 진리는 냉혹하다.”고 했습니다. 진리와 사랑은 항상 함께 붙어 다닙니다. 성경에서 몇 가지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라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엡4:15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오늘날 기독교와 타종교의 연합은 사랑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자”만 외칠 뿐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자”고 외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진리에 대한 동일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안에 거하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인함이로다.]

1-3절의 이 세 구절 속에 진리란 단어는 무려 4번이나 등장합니다. 진리란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고 하셨습니다. 동시에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라고 증거하셨습니다. 고로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으로 진리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진리 한 가운데로 인도하고 계십니다(요14:16-17,; 16:13).

진리, 진리 외치지만 막상 진리에 대해서 막막한 감정이나 막연한 신학적 개념만을 잡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란 객관적 사실이며, 동시에 내 안에서 역동하는 주관적인 인격체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고, 말씀이 진리이며, 성령 또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5:6을 보십시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심이라.] 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과 진리를 아는 모든 자가 본문의 주인공과 그 가족을 사랑하는 이유는 같은 편이거나, 같은 교회 다니거나,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십니까? 해답이 바로 2절 말씀입니다. [...진리로 인함이로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 안에서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사도 요한이 지금 가장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아버지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되심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와 긍휼]-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 공의, 심판이 아니라 바로 은혜와 긍휼입니다. 은혜라나 받을 자격이 없는데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요, 긍휼이란 벌을 받아야 하는데 면제받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을 통해 은혜와 긍휼을 입은 사람만이 하나님과 화평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PEACE라는 한 단어는 우리말로 평화, 화평, 평안, 평강, 화목, 화해 등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성경적 용례를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① PEACE WITH GOD-이는 십자가 상에서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가 풀리고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함으로써만 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길 수 없으면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② PEACE OF GOD- 이는 하나님과 화해의 관계를 이룬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성령께서 주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바로 화평(PEACE)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열망하는 “마음 편히 사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을 해결해 주는 열소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PEACE ON EARTH- 이는 주님께서 다시 돌아오셔야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림 때에 주님이 오심으로 인해 이 땅에 평화가 정착된 예는 없습니다. 주님이 지상 재림하여 천년 왕국을 건설하심으로써 이 땅에는 진정한 평화가 옵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아무리 외쳐도 이 땅에는 더 많은 전쟁만 있을 뿐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네 자녀들이 우리가 아버지께 명령을 받은 대로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보고 내가 크게 기뻐하였노라.]

목자들이 누리는 최대의 기쁨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양들이 진리 안에서 든든히 세움을 입을 때, 말씀 안에서 꾸준히 성장할 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반면 이단으로 빠졌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타협했다는 말을 들을 때 크게 낙담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교회 나오는 형제들을 볼 때, 성경을 배운대로 출력되지 않는 형제들을 볼 때 절망스럽습니다. 우리 교회 형제, 자매들을 볼 때마다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를 보는 듯합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미적지근한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오거나, 기회만 나면 빠지고, 기회가 없으면 기회를 만들어서 빠지려는 사람들은 이 시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킹제임스 성경으로 하는 교회면 그 성경에 맞는 삶의 수준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이 “진리 안에서 믿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한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알고 믿는 것으로 그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5절을 보십시오. [부인이여, 이제 네게 간청하노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내가 새 명령을 쓰듯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처음부터 가진 것을 쓰노라.]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자”는 계명이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계명이란 사실을 상기해 줍니다. 구약의 율법에 이 조항이 있습니다. 레위기 19:18에 “너는 네 원수를 갚지 말며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외적인 율법이었습니다. 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신 계명은 내적으로 주신 성령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음이니”(롬5:5)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9가지이지만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사랑이란 열매에 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요한은 다혈질적이고 성격이 급하며 소영웅주의에 빠진 이기적인 사람입니다(마20:20,눅9:50, 눅9:55). 그는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주님의 좌,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어떤 사람이 마귀를 내어 쫓는 것을 보고 금지시켰으며,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나이까? 했다가 주님께 크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변화되어 사랑의 사도라 일컬음을 받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도 여전히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문제가 바로 우리 교회의 문제이며, 우리 교회의 문제가 바로 한국 교회의 문제입니다. 지금 남의 교회와 세상을 비판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앉아 계신 여러분의 자화상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변화되지 않고 남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 개혁을 부르짖기 전에 자신의 변화를 부르짖으십시오.

6절을 보십시오. [또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요, 명령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안에서 걸으라 하는 것이라.]

성경적 정의의 사랑이 확실하게 나와 있는 곳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사랑은 이것이니...]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느낌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바로 행동입니다. 걷는다는 영어 단어는 walk란 동사입니다. 우리말로 행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는 행동이요, 실천이었습니다. 성경의 사랑은 한번도 관념이나 신조나 사상이나 믿음을 가리킨 적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주는 것이요], [베푸는 것], [희생], [섬김]과 같은 실천적 행동 윤리이지 정신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 같이 6절 말씀을 크게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요, 명령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안에서 걸으라 하는 것이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사랑한다는 말은 쉽게 하면서 형제들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용서하라는 명령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의 명령은 앞에 적절한 부사어가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형제들 또한 진심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는 속이는 자가 세상에 많이 들어 왔음이니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라. 이런 자가 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이 말씀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거짓 교사의 부류에 대해서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는 본문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신성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둘째는 주의 재림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같이 그대로 계속된다 하니”(벧후3:3,4)

셋째는 금욕주의자들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 명령할 터이나..”(딤전4:1-3) 넷째는 유다서 4절에나오는 부류입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로서 반성경, 비기독교입니다.

다섯째는 자기파를 형성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알거니와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행20:29-30)

여섯째, 은밀히 교회에 이단들을 끌어들이는 자들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이들을 분별하고 처리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모두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영벌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는 자들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독한 길을 따르리니 그들로 인하여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요,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말을 가지고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래 되어 이제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받을 영벌은 잠자지 아니하느니라.”(벧후2:1-3) 우리는 속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 자신을 살필지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룬 것들을 잃지 아니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게 하려 함이라.]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적절한 대가를 받지 못할 때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 몸으로 행한 일에 대해서 불로써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고도 잃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1. 법대로 하지 않는 경우(딤후2:5)-“또한 우승하려고 애쓰는 자가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월계관을 얻지 못하며

2. 장로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경우(히13:17)-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혼을 위해 깨어 있기를 마치 자기가 회계 보고할 자인 것같이 하나니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3.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경우(고전13:3)-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를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바울 사도는 항상 자신을 살폈습니다. 그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도 열매에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한 뒤에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고전9:27)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는 목자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하노라”(갈4:11). 여러분들도 여러분이 이룬 것들을 잃지 않고 충분한 보상을 받도록 넘치도록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을 넘치게 하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전15:58) 또 히브리서 6:10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지금까지 성도들을 섬기며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심이라.”

9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범죄하여 그리스도의 교리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없는 자며 그리스도의 교리 안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자니라.]

사람들은 교리라고 하면 신학적이고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고리타분한 논쟁과 사상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리는 어떤 것에 대한 정확한 진리를 말합니다. 세대주의나 칼빈주의, 언약 신학과 같은 신학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한 하나님의 지식이며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의 교리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의 사실과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었다는 경건의 신비를 말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한 채 너희에게 나아오거든 그를 너희 집에 받아들이지 말고 그에게 축복 인사도 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이 손님을 접대하고 섬기는 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교리를 갖지 않는 사람은 함께 친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한 사귐은 선한 행실을 부패시키기 때문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런 자들과 함께 앉지도, 서지도, 걷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라 해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그 사람과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이 서신으로 전하는 우리의 말에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주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살후3:14).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분리, 비일치, 비동조라는 3대 원칙에 따른 삶입니다. 교리도 틀리는 목사들의 모임에 앉아서 경청하거나 교단에 가입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런 목사와 밥을 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그런 목사님이 누구라해도 저희 교회에 초청하거나 강단에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축복 인사를 하는 자는 그의 악한 행위들에 참여하는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에게 축복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형제들이 비성경적인 직업을 가지거나 선택을 했을 때도 절대 축복 인사를 하지 마십시오. 불신자와 결혼하는 교회 형제, 자매가 있다면 그 결혼식에 참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신자와 결혼하겠다는 것은 평생동안 주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실행입니다. 언젠가 그리스도인이 형제 중매를 서주는데 불신자 여자를 소개해 주는 것을 보고 기가 막힌 적이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이 다 불법에 동조하는 것이며 악한 행위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대신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께서 임하심으로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를 외쳐야 할 것입니다.

12-13절은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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