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요한삼서1-14

요절: 2,3 [사랑하는 자여, 무엇보다도 네 혼이 형통함같이 네가 형통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걷는다 하므로 내가 크게 기뻐하였노라.]


요한삼서는 주후 90년경 사도 요한에 의해서 기록된 64번째
성경이며, 1장 299단어(KJV)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오늘 세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짧은 서신을 읽으면서
세월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살아있던 그 당시 지역교회의 문제는 오늘날 저희들이 안고 있는 지역
교회의 문제와 별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 삼서의 핵심적인 단어 중 하나는 witness(우리 말로는 증거, 증언으로 번역됨)란
단어입니다. 3, 6, 12에 나옵니다.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증언한 것은 우리의 말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교회의 지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증인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를 증거해 줄 사람들이 바로 옆에 있는 형제, 자매란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의 증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장로는 극진히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여기 등장하는 가이오란 사람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그 가이오를
말하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가이오의 집 식구에게 침례를 주었고(고전1:14), 나와 온 교회를
접대하는 가이오(롬16:23)라고 문안 인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네
차례에 걸쳐(1,2,5,11) ‘사랑하는 자’라고 언급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여러분의 목자나 형제들에게 이런 애정과 칭찬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도 형제 간에 편지나 카드를 보낼 때 “주 안에서 사랑하는...형제에게”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씁니다. 하지만 ‘주 안에서’란 말을 떼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2, 5, 11에서 요한은 이름대신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했을 뿐
아니라 몸소 그런 사랑을 실천한 사람임을 알게 해 줍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요, 복음적인 사랑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여, 무엇보다도 네 혼이
형통함같이 네가 형통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노라.]
이 구절은 한국 교회의 교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기복 신앙의 촉매로 써 먹은 목사님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라고
번역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구절입니다. 흔히 3중 축복이라 하여 물질적 축복, 영적 축복, 건강의 축복을 기원하는
말로써 성도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은혜를 지지하는 말씀으로 애송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영적 교훈으로 말씀을 적용하고 암송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2절 말씀을 본문에 입각해서 자세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이 지금 가이오에게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Beloved, I wish above all things that....}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는 ...했으면 좋으련만, 하는 특수 가정법
구문입니다. 가이오의 현재 상태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가이오는 지금 병이 들었거나 병이 들었다가 회복기에 접어 들었거나 한 상태임을 암시
해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가이오의 육신적인 건강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기에 빨리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가 비록 질병에 걸려
있다 할지라도 영적인 상태는 매우 건강했기 때문에 “네 혼이 형통함같이...”(even as thy soul prospereth)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겉 사람이 어떠하든지 간에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건강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
(고후4:16)하였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인 육신은 음식을
통한 충분한 영양 섭취, 운동, 적절한 휴식, 균형잡힌 생활을 통해서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속 사람 역시
하나님의말씀과 경건의 훈련과 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로부터 자신을 정결하게 지킴으로써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운동과 훈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적절한 휴식입니다. 언제든지 주님께로 나아가 평안한 쉼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in
thee- 네 안에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걷는다
하므로 내가 크게 기뻐하였노라.]
우리는 가이오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며 가이오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형제들로부터 ‘진리 안에서 걷는다’는 선한 평판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그
교회에 있는 어떤 형제 잘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목자로서 대답하기 난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 교회 형제, 자매들에 대해서 물어 보면
정말 난감합니다. 교회를 죽지 못해 다니는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어떻게 빠질 기회가 없나? 그것만 노리고 있다가 몸이라도 찌뿌듯하면 ‘감기
기운있어 못 가겠다!’는 식입니다.


가이오 안에는 진리가 있었습니다. 가이오의 몸은 약하고
병들었을지 몰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
(골3:16).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걸었습니다. 가이오는 진리를 듣고, 믿고,
아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진리를 알고, 믿었지만 결코 진리 안에서 걷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화, 있을진저! 저주를
퍼부은 것은 그들이 진리를 몰랐거나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리를 믿는대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어떤 목사님은
교회를 건축하고 나서 교회 기둥에다 다음과 같은 말을 새기게 했습니다. “내가 진리를 선포하지 않으면 내게 화로다!” 킹제임스 성경을 가진
여러분, 진리대로 걷지 않으면 화(禍)가 있을 것입니다. “화있을진저, 킹제임스 맨들이여, 네가 진리를 알고도 행치 아니하였도다!”란 무서운
저주가 귓전을 울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바울 사도도 이 점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함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고전9:16). 행동하지 않는
지식,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걷는다 함을
듣는 것보다 내게 더 큰 기쁨이 없도다.]


요한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자신의 자녀들, 자신이 복음을 전한 형제들이 진리 안에서 걷는다함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목자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쁨입니다. 자녀가 태어나는 것은 부모에게 엄청난 기쁨이며, 축복입니다. 그 자녀가 잘 자라는 것은 더 큰 기쁨입니다.
자녀가 매일 사고나 치고 다니고, 부모의 뜻에 거슬리는 짓만 일삼아 보십시오.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한국의 초기에 왔던 침례교 선교사들이 하나같이 비통해 하는 것은
자신들이 씨를 뿌리고 길렀던 제자들이 배교해서 장로교 간판을 달거나 은사주의 교회로 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독립 침례 교회 선교사들은 더욱
비참해 합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어느 정도 배우고 나서는 독립 침례교회를 포기해 버리고 교단 교회로 들어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들고 목회하는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목사님도 사도 요한 같은 고백을 하는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하나 같이
하는 말씀인 즉 “우리 교회 형제들은 몸이 뒤따르지 않아!”입니다. 몸이 앞서는 지체들은 진리에 어긋나 있고, 진리를 제대로 가르쳐 놓으면 몸이
작동하지를 않는다는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은 자신의 지역 교회 목자가 아니라 목자장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란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5절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형제들에게나
낯선 자들에게나 무엇을 행하든지 신실하게 행하니]
가이오는 베드로전서 4:10-11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그 은사를 써서 섬기라. 만일 누가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섬기려거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 모든 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분께
찬양과 통치가 영원 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가이오는 형제 대접하기를 힘썼고, 낯선 자들을 대접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형제 교회 교인들은 교회에서 발행하는 추천서 한 장만 지니고 있으면 전국을 무전여행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같은
형제 교회 교우들을 다 맞이해 주기 때문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알지 못하는 가운데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도 있었느니라.”
(히13:1,2)


6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네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after a godly sort) 그들의 여행을 후원하면 잘하는 것이리라.]


여기서 여행은 전도 여행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 형제들이 전도 여행을 떠나면 그 지역에 있는 같은 그리스도인을 찾아서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험해서 이렇게 할 수 없지만 미리 전화나 편지로 연락을 받거나 추천을 받으면 가능할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형제님이 누가
인천으로 오는데 만나 보라고 하든지, 하룻 밤 재워 주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로마서 16:1,2에 보면 그런 예가 나옵니다.
“내가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의 종인 우리의 자매 뵈베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안에서 성도의 마땅한 도리로 그녀를 영접하고 무슨 일이든지
그녀가 너희를 필요로 하거든 도와 줄지니 이는 그녀가 여러 사람과 나의 후원자가 되었음이라.”
가이오는 형제들에게 house- open뿐
아니라그들의 여행을 물질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선교에 직접 나서지 못하는 사람은 선교사를 물질적으로 후원해야
합니다. 디도서 3:13,14을 보십시오. “율법사 세나와 아볼로를 부지런히 도와 여행하게 하고 그들에게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게하라. 또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도 필요한 용도를 채워주기 위해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 그리하여야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아니하리라.”

가이오의 선한 행위는 성경에 기록되어 영원히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의 행위는 공개적으로 간증되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행위를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성도들의 본으로 삼으셨습니다.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
선교사를 지원하는 내가 그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선교 지원을 받도록 명하셨습니다. “그 집에 머물며 그들이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움직이지 말라.”
(눅10:7)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로
지원한다고 하면서 물질적 지원에는 매우 인색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서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였음이라.]
만약 가이오와 같은 신실한 성도들의 물질적 후원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사역의 지원이 없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는 형제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고 하면서 자신은 뒤로 빠지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그런 일을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가 제공하는 어떤 후원도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후원이 아니라 올무로 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위하여 함께 돕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복음에만 매진하고 헌신한 선교사를 돕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그들을 영접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 교회에는 가짜 선교사가
너무 많아서 선뜻 지원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서 나간 형제들이라면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어느 지역에 교회를
세우든 해외로 나가든 능력이 닿는 대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사가 될 수는 없지만 모두 선교 사역은 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교회에게 썼으나 그들 가운데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가이오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 디오드레베입니다.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상 공생애 동안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늘 있었던
갈등이었습니다. “누가 가장 큰 자냐?” 는 논쟁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주님을 찬탈하려는 마음과 같습니다.
주님이 모든 것의 으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몸 곧 교회의 머리시라. 그분께서 시작이시오,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나신 분이시니
이는 그분께서 친히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골1:18). 디오드레베는 성경의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
(마18:3) 침례인 요한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여자 가운데서 태어난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란 칭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낮추심으로서 가장 높은 자가가 되셨습니다. 반면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과 비기려했던 마귀는 가장 낮은 부분으로 끌어 내려졌습니다. 교회 내에 이런 자가 있으면 공개적으로 아니면 뒤에서
수군거리거나 형제들을 규합해서 목자를 성토합니다. 어느 교회나 이런 사람은 있게 마련인데 교회의 공식적인 기구나 모임대신 항상 사적인 모임과
비공식적인 기구를 활용해서 활동합니다. 사무엘하 15:1-6에 보면 압살롬은 다윗에게로 향한 백성들의 마음을 훔칩니다. 그는 자신이 다윗보다 더
잘 해 줄 것이란 암시를 백성들에게 계속 심어 줍니다. 히브리서13:17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제시합니다. “너희를 다스리는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너희 자신을 낮추어 복종하라.”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가 행하는
행위들을 기억하리라. 그가 악한 말들로 우리를 헐뜯고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며 자기 자신도 형제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들도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교회는 항상 이런 문제들로 홍역을 치릅니다. 지난 수년동안 여러분은 이런 현상을 몸소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살아 있을 때에 사도를
대적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하물며 지역 교회 목회자에게 대적하는 것이야 얼마나 쉽겠습니까? 요한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디오드레베를
처리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문제가 터졌을 때 “...지금은 내가 떠나 있으나 지금까지 죄를 지은 자들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고후13:2)고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내쫓기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교회의 목자에게 주어진 영적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들을 보호하고
잘못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 정치인들처럼 자기 권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떼에게 본이 되라.”
(벧전5:3).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따르지
말고 선한 것을 따르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나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은 디오드레베를 따르지 말고 곧이어 나오는 데메드리오를 따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마귀를 따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코라를 따르지 말고 모세를 따라야 합니다. 열명의 정탐꾼을 따르지 말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따라야 합니다. 데마를 따르지 말고 디모데를 따라야
합니다. 어디나 따라야 할 사람이 있고 따르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나”란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받은 질문 가운데 하나는 마더 테라사 수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평생동안
빈민 선교와 고아들을 구제함으로써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캐톨릭에서 성인으로 봉헌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였느냐?는 질문 같았습니다.
슈바이쩌 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은 선을 행했습니다.
성경에는 오늘날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보다 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산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옵니다(행10장). 그는 구제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 유대 백성들 사이에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오늘날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고넬료가 구원받은 것은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듣고 믿고 나서였습니다. 요한이 본문에서 말하는 “선을 행하는 자”는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바탕에 깔고 하는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만 그들의 선행이 하나님께 기억됩니다. 경기 시작 전에 골대를 향해
내리꽂는 덩크 슛은 점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선(善)을 행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義)를 행해야 합니다(요일2:29).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느니라.”-
오늘날 저희들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하기 상당히 어려운 구절입니다. 대신 몇 개의 참조 구절을 통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언
20:7-9을 보십시오. 첫째, 주님은 악을 흩으십니다. “순전하게 걷는 자가 의로운 자니 그의 자녀들이 그를 따라 복을 받느니라. 심판의
왕좌에 앉은 왕은 자기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였으니 내가 죄에서 떠나 순결하다, 할 자가 누구리요?”

주님께서는 악을 흩어지게 하시며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십니다. 둘째, 악인을 흩으십니다. “지혜로운 자는 사악한 자를 흩으며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
(잠20:26)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마5:8) 제가 인용한 모든 구절은 현재 저희 교회에서는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대신 영적으로 적용해서 교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에게서와 진리
그 자체에게서 좋은 평판을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희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 아느니라.]


성경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는 한 무명의 사람이 잠깐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혼탁한 시대에 데메드리오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숨겨
두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철저하게 성경대로 살면 둘 다 인정을 받습니다. 대부분은 위선자로 살기 때문에 이리저리 욕을 얻어 먹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왕국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화평과 희락이라. 이러한 것들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며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느니라.]
(롬14:17-18). [긍휼과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들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의 눈 앞에서 은총과 큰 명철을 얻으리라.]
(잠3:3,4)


13,14절은 인사말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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