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요한복음 4강.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 요 1:14
요절: 요 1:14

지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들뿐입니다(시14:1). 하나님이 존재하며,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마귀도 믿고 떠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와 조명없이 결코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말씀이 하나님이시다”란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요1:1)는 분명한 선언과 함께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있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란 사실이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의 본질입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는 [말씀은 하나님이시다](요1:1)란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이 사실은 철학과 종교의 영역을 훨씬 넘어선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 수 있는 지식입니다.

마귀가 결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진리가 바로 “말씀은 하나님이시다”란 진리입니다. 마귀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는 진리 역시 말씀이 하나님이시란 사실입니다. 메시지, 사상, 이념, 감정, 의지, 힘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이 하나님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빛이시지만 빛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영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요4:24).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속성의 한 가지를 나타낼 뿐이기에 역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역이 성립되는 한 가지 명제는 “하나님은 말씀이시며, 말씀은 하나님이시다”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란 이 엄숙한 선언은 성경을 믿는 독자들에게는 마치 어떤 천연 암반석보다 더 확실하고 견고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란 선포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 신분, 정체성을 계시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란 이 기초 위에 서 있지 않는 신앙은 한낱 철학이나 종교일 뿐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무슨 이론과 추측과 가설을 내 세워도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우리가 믿고 고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란 이 한 가지 사실만이 성경의 중추적 뼈대가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제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어떻게 거하게 되었는지 성육신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풍성히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명쾌한 구절이며, 그분의 신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육체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이 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의 꿈은 수련과 고행, 금욕과 깨달음을 통해서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을 소원할지언정 결코 신이 인간이 될 수 있다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신화나 전설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던지, 사람들의 눈속임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경우는 있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마술이나 저주에 걸려서 오랫동안 왕자가 짐승이 되었다는 이야기(미녀와 야수)나 죄를 지어서 내세에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불교, 라마교, 힌두교 등의 윤회설이 있지만 거기에도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성육신에 관한 이 내용은 오직 성경에만 존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나 꿈에서도 상상해 본적이 없는 선언입니다. 구약에서 일찍이 예언되어 있었던 이 말씀은 유대인들조차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대언자 이사야는 일찍이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딤전3:16)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란 증거이며, 이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이 임합니다. 마귀는 이 구절을 가장 싫어하는 구절 가운데 으뜸으로 놓고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변개시켰는데,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현대 역본들은 God(하나님) 대신 he(그)라고 바꾸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여자에게서 나시고, 성령에 의해 잉태되셨으며, 육신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까?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느니라](롬8:3).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이 되셔야만 죄를 감당할 수 있으시고, 죄로 인해 죽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주님은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마귀를 멸하시고, 죄를 없애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의와 거룩, 사랑과 긍휼의 법과 서로 모순됩니다. 죄를 일방적으로 용서하면 공의와 거룩이 무너집니다. 죄인들의 죄를 철저히 심판하시면 사랑과 긍휼이 무너집니다. 이 둘을 모순없이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성육신입니다.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갈4:4). 주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요구대로 죽으심으로 율법의 공의와 거룩함을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셨습니다. [스스로 무명(無名)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2:7-8).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목적입니다. 죽으실 수 없는 주님께서 죽으시기 위해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 사람의 모습, 사람의 모양이 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또 한 가지 이유는 마귀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범죄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려 하시는 것이라.](요일3:8).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멸하시는 방법은 불이나 칼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마귀를 멸하심으로써 마귀의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모두 건져 내셨습니다. 만약 마귀를 전능하신 능력으로 쓸어 버리셨다면 마귀에게 속한 자들 역시 모두 죽음에 처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히2:14-16).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심으로써 마귀는 주님을 시험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고,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마귀는 승리를 자신했지만 주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멸망이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망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결코 이 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마귀 역시 십자가에 숨겨진 하나님의 지혜를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육신의 신비와 더불어 하나님의 지혜이신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 통찰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있기 전에 미리 정하신 감추어진 지혜를 복음을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직 신비에 쌓인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7-8).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고, 우리를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그분께서 죽음을 통하여 자기 육체의 몸으로 너희를 화해하게 하사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아버지/의 눈앞에 드리고자 하셨으니](골1:22).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자신과 원수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화해하셨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불붙은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을 자신이 대신 담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 주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주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된 자에서 사랑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모든 일에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되심이 마땅하니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서 친히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하여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히2:17).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 에덴에서 여자가 마귀에게 속아 죄를 범하였듯이 더 이상 악한 영들에게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4:2).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신가? 아닌가?를 물어 보기만 하면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도, 유대교, 모슬렘을 비롯한 많은 종파들이 하나님을 믿지만 여전히 마귀에게 속한 자들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속이는 자가 세상에 많이 들어왔음이니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라. 이런 자가 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요이7). 성육신의 진리는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고 왔음이니라.](막10:45). 사람은 예외 없이 누구나 섬김 받고 싶어 하지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섬기려고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주려고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주님께서 죄인들을 섬기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주님을 위하여 죽겠다는 사람이 자기 형제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저런 작자와 같은 교회에 다닌다니 불쾌해!”, “형제라고 부르기에 내 입이 더럽다. 저런 놈과 같이 천국 간다면 저 세상도 깨끗하긴 틀렸군!”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구히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이 되셔서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온 것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죽으실래야 죽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영원히 죽으실 수 없으신 생명의 창시자요, 생명 자체이신 분께서 죽으시기 위해서 주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생명을 버리노라.](요10:15).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죄인들의 몸 값, 대속물이 되신 것이 성육신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사람들이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고 피상적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 보이는 법이듯이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만 이해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되고, 잘못된 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해 주시고, 보여 주시고,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풍성하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볼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셨사오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낼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니라.](마11:27). 예수를 통하지 않고 아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경건의 신비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오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보는 안경을 주신 것입니다. -말씀 침례 교회 성탄 특강- 경건의 신비에서 부분 발췌, 참고할 것.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왔음이니라.](요6:38). 주님은 철저히 성경대로 사셨으며,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바와 같이)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였노라, 하시느니라.](히10:7).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성육신의 목적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거처인 하늘의 보좌가 아니라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거하다’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장막을 치다’란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탄생을 유대인들의 장막절 절기와 연관을 짓기도 합니다. 주님은 어디에 거하십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현재 주님은 어디에 거하십니까? 저와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다. 여러분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만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신줄 알지 못하면 그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듯이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우리는 자기 혼자 멋대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며, 누가 교회 교적부에 올려 주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를 받고, 교회의 직분을 맡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으로 확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을 증거해 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신줄 알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의 신비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7).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만유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며, 부활 승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 성도는 결코 부족함을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영적 풍요로움을 경험하는 비결은 바로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심을 아는 것이요,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신줄 알지 못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요일4:4). 승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크심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찾아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승리하신 분이란 사실을 알고, 믿을 때 세상의 어떤 시험이나 유혹, 시련과 풍파도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왜 그렇게 연속된 패배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신줄 알지 못하는 자는 열매 맺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은 주님이 어디 계신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며, 그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15:4-5). 열매맺는 비결은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대로 그분께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일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땀과 수고로 인위적인 일을 성령의 열매인양 간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열매는 만들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신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거룩한 성별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과 연합하여 엉망이 된 성도들을 향해 엄히 책망하기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3:16)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성령이 계신다는 엄숙한 사실을 직시할 때 자신을 거룩히 구별할 줄 알게 되며,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날 입으로만 주님을 외치지만 실제로 전혀 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 진리에 대해 너무나 희미하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거의 믿지 않는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믿음으로 결합하지 못할 때 아무런 능력도 효과적인 사역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살전 2:13, 히4:2).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신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헌신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 여전히 자신인 줄 압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들은 주님이 자신의 주인인 줄 알며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줄 압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고전6:19).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성전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전적으로 소유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몸을 죄 가운데 거하게 해서는 안 되며, 불의의 병기로 드려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신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부활의 확신과 소망이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부활의 능력과 소망은 늘 차고 넘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사망 권세에 매인다는 것은 그가 아직 주님의 내주하심에 대한 인식이 극히 결여 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느낌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은 오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감각으로 알 수 없다면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지 그렇지 않는지 아는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첫째,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자는 압니다.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는 그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힘입어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아는 방법은 주님의 명령들을 지키는지 거부하는지를 통해서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명령들이란 곧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성경을 읽으려고 합니다. 성경을 좀 더 알고 싶어 합니다. 배고픔이 있고, 목마름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죽은 자입니다.

둘째, 믿을 때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압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3).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 안에는 성령의 인침, 확증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입니다. 저는 처음 구원받던 그 날 내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신학적, 영적 지식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저는 이전에 단 한번도 성경을 읽은 적이 없었고,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었고, 교회나 신앙적 배경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제가 주님을 마음으로 영접했을 때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후에 성경을 배운 후에 말씀을 통해 제가 안 지식이 사실임을 확인 받았는데 바로 다음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4:15).

셋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고 또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시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처음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이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요한은 여러 차례 주님의 영광을 목격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변화산상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후의 모습입니다. 이적과 표적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주님의 영광을 다 보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게 할 때에 교묘히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라.](벧후1:16). 죽은 사람을 살릴 때 요한은 주님과 동행했으며,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드러내 보이신 영광은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종류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이란 독생자, 즉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주님이 보여 주시는 어떤 영광도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보일 수 없는 그런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행하시는 말씀 사역과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듣고 보기만 해도 우리는 이런 사역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하신 분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이적과 능력의 역사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은혜란 마땅히 멸망을 받아야 할 사람이 멸망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노아는 물로 심판받아 멸망당할 세상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창6:9).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으로 심판할 때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때 롯은 건짐을 받았는데 그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보소서, 이제 종이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고 또 주께서 주의 긍휼을 내게 넘치게 하사 내 생명을 구원하심으로 긍휼을 베푸셨나이다. 내가 산으로 도피할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이 나를 덮쳐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창19:19). 은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와 허물로 죽음과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건지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이 땅에 은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출34:6).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과 같은 표현은 모두 주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자에게 넘치도록 풍성하게 드러났으며, 부어 주십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1:14).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딛2:11). 은혜는 결코 일의 대가가 아니며, 수고의 삯이 아닙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은 한 절에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간결하고도 정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결코 따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진리를 배격한 채 은혜를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은혜를 구한다고 기도합니다. 은혜를 받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진리없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종교적 카타르시스이거나 영적 망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을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진리와 동떨어진 마음의 감동은 은혜가 아니라 마귀에게 속은 것이며, 자신에게 속은 것입니다. 은혜는 진리 안에서만 효용 가치가 있으며, 열매를 맺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 그 날부터 온 세상에서처럼 너희 안에서도 열매를 맺는도다.](골1:6).

다 같이 14절 말씀을 암송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