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말씀: 요 1:19-28
요절: 요 1:23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정립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의 부르심을 받았고, 언제 어떻게 보내심을 받았으며,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침례인 요한은 “너는 누구냐?”란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너는 누구나?”란 질문을 여러 차례 받으셨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에게 묻는 이런 질문에 지혜롭게 대답하시면서 침례인 요한까지 포함해서 그가 누구인지를 증거해 주셨습니다.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행하느냐? 또 누가 이런 일들을 행할 권위를 네게 주었느냐?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너희에게 질문을 하나 하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행하는지 너희에게 말하리라.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들에게서 났느냐? 내게 대답하라, 하시매](막11:28-30).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집요한 정체성 공격에 침례인 요한의 정체성에 대해서 역으로 물으심으로 그들을 난감하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요한의 권위, 권세가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선포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요한에 대해 선포한 또 한 가지는 여자 가운데서 난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란 사실입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사람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 제자들이 계속해서 누가 큰 자인가를 다툴 때 주님은 가장 큰 자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 주셨는데, 첫째는 주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가장 작은 이 명령들 가운데 하나를 어기고 또 그와 같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로되 누구든지 이 명령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 곧 그는 하늘의 왕국에서 큰 자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사람들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고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 유명세를 떨친 사람, 작품을 남긴 사람들을 큰 자라고 하지만 주님은 주의 명령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침례인 요한은 단연 위대한 자란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쳤고, 그대로 살도록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증거했습니다.

둘째, 자기를 낮추는 자가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마18:4).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고 싶다면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침례인 요한은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주님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증거하지 않았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반드시 쇠해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그는 일신의 영광이나 영예, 칭찬을 조금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얼마나 낮추었는지, [그가 선포하여 이르되,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께서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1:7, 요1:27).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푸는 것도 감당못할 정도의 종 아래의 신분으로 낮추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가장 큰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오직 너희 중에 가장 큰 자는 너희 종이 될 것이요,](마23:11). 우리 중에 큰 자가 있다면 그는 윗자리에 앉아서 권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진리와 반대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그리하지 말지니 너희 가운데 가장 큰 자는 어린 자와 같고 으뜸인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음식 앞에 앉은 자와 섬기는 자 중에 누가 더 크냐? 음식 앞에 앉은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노라.](눅22:26-27). 우리 교회에서 누가 가장 크냐고 물으면 식사 시간에 써빙을 하는 분이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이런 점에서 침례인 요한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섬겼기에 가장 큰 자란 칭함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주님의 종’은 드물고 ‘주의 종님’만 넘칩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당시 요한이 얼마나 영적 영향력이 있었던지 예루살렘에서 침례인 요한에 대한 파견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더니 그가 부인하지 아니하며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매](19).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라고 물은 것은 혹시나 침례인 요한이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당시 침례인 요한의 메시지는 하늘의 왕국에 관한 것이었고, 백성들에게 침례를 주면서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으로 인해 회개하고, 침례를 받았으며 백성들은 혹시나 요한이 메시야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백성이 기대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그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하매](눅3:15).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 점을 조사하기 위해 나왔던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란 질문은 이름이나 주소, 전화번호, 출신 지역, 학력을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요한은 그들의 질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 듣고 즉석에서 대답했는데,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행여나 오해받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눈과 귀를 가릴만한 어떤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드러내어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선포했습니다. 요한의 이런 공개적이고도 분명한 선포는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행해졌기에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 한 것을 너희 자신이 증거하느니라.](요3:28). 백성들이 바로 증인이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낮추었으며 자신의 사역이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위한 보조자에 지나지 않음을 선포했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그리스도와 분명하게 비교하고, 대조해서 증거했습니다. [요한이 그들 모두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시나니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눅3:16).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면서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는 능력 있는 분의 오심을 증거했습니다. 요한은 뒤에 오시는 분이 자신보다 앞서신 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곧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라.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요1:27). 이런 요한의 증거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 훗날까지 요한의 증거를 환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례인 요한의 증거 가지고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치며 이르되, 너희가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니라. 그러나, 보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매 나는 그분 발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였으니](행13:25). 이런 예는 후에 또 나옵니다. 요한은 이렇게 증거했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는 증거는 참으로 능력있고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비록 죽었으나 후대에 여전히 그의 살아 생전 했던 사역은 생명력있게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참으로 요한이 회개의 침례로 침례를 주며 백성에게 말하되 너희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믿어야 하리라 하였으니 이분은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하거늘](행19:4). 침례 요한은 오직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 뒤에 오시지만 자신보다 앞서신 분이시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오, 자신이 신발끈을 풀기에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증거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란 요한의 말씀은 자기 부인(self denial)의 전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No, Nothing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주의 은혜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누가 물을 때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나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며,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요5:30). 사도 바울 역시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서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나무 가지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라.](갈6:3). 오늘날 교육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자랑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가르칩니다. 침례인 요한이 누구 앞에서도 “나는...아니요”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나는 ...아니요”란 자세로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침례 요한의 솔직한 자기 부인의 공개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질문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이 또 그에게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매 또 /묻되/, 그러면 네가 그 대언자(代言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아니라, 하거늘 ](21). 그들은 메시야가 아니란 요한의 대답에 즉시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에 따르면 메시야보다 앞서 간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라,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 이들은 성경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서기관들 역시 메시야의 오심 이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백성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이 점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여쭈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참으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다 그에게 행하였도다. 사람의 아들도 그와 같이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침례자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7:10-13). 이 때 주님은 서기관들이 성경을 잘못 알았다거나 오해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잘못 알았을 때 [... 너희가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막12:24)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에 관한 내용은 서기관들의 말이 옳다고 하셨으며,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는 침례인 요한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말했는데, 주님은 그가 ‘엘리야’라고 인정하셨으니 성경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난감해 하는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온 것은 분명합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그분보다 앞서 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예비된 한 백성을 준비하리라.](눅1:17). 이 점에서 주님은 침례인 요한을 엘리야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 자신은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백성들이 엘리야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5, 12:18, 12:21의 이방인에 대한 말씀의 변화를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온 집에 보내어 왕국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 [만일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11:14)하면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강력하게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말씀을 받지 않았고, 주님은 이방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택한 나의 종, 나의 혼이 매우 기뻐하는 자 곧 나의 사랑하는 자를 보라.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두리니 그가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베풀리라.](마12:18), [이방인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리라, 하였느니라.](마12:21). 요한이 말라기 4:5에 예언된 그 엘리야가 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요한의 증거를 받아 들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 시대가 없이 곧 바로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감옥에 갇혀서 죽어 버렸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아 버림으로써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임하는 대신 이방인의 때가 계속 되고 말았습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에 없던 교회 시대가 전개되었습니다.

“그 대언자냐?”라고 물은 것은 모세가 말한 신명기 18:15,18을 염두에 둔 질문입니다. 모세는 자신과 같은 한 대언자가 일어날 것을 대언했는데, 유대인들은 그를 ‘그 대언자’(the Prophet)이라고 불렀습니다. [15[주] 네 하나님께서 네 한가운데서 곧 네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켜 세우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니라. 18이에 따라 내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켜 세우고 내 말들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가 그들에게 다 말하리라.](신18:15,18). 침례인 요한이 대언자인 것은 분명하였지만 모세가 말한 “그 대언자”는 아니었습니다. “그 대언자”란 메시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질문에도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요한의 대답은 계속되는 자기 부인, 자기 부정이었습니다. 긍정으로 대답할 질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 자신을 가리켜 누구라 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대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하니라.](22-23).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종교 지도자들은 침례 요한에 대한 심문을 계속합니다. 그 때 요한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대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하니라.](23).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해답이 있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며,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침례 요한은 그 점에서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성경을 통해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이사야 40:3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을 위해 큰길을 곧게 만들라.](사40:3). 성경 말씀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보다 더 크고 복된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조명 없이는 사람은 아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압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란 요한의 사역지, 요한의 사역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입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지만 사람들을 불러 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불러냈습니다.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광야는 물과 음식이없는 곳이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기에 “땅의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하늘만 청청하게 맑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같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살아도 광야에 있는 것처럼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소리(voice)는 말을 전파하는 수단입니다. 보이지 않는 말(words)을 보이게 하는 것이 글(letter)이며, 들리지 않는 말(words)을 들리게 하는 것이 소리(voice)입니다. 주님은 말씀(Word)이시기 때문에 요한은 그 말씀을 담아 전파하는 소리였습니다. 소리는 말(words)과 달리 잠시 있다 사라집니다. 요한은 이 땅에 잠시 있다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요한처럼 누군가 나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합니다. 모든 질문에 온유함으로 답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바른 대답을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너희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가 있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바를 알게 되리라.](골4:6). 둘째, [오직 너희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벧전3:15). 요한은 그들의 집요한 질문에 온유하게 대답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직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한 요한의 답변은 메시야의 도래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배운 지식이 아니며, 부모에게 배운 것도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조명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의 깨우침을 통해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와 허물 가운데서 살다 죽어 영원한 지옥으로 갈 더러운 죄인임을 압니다. 그러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흘림을 통해 구원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 역시 압니다. 너는 누구냐?란 질문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답할 수 없는 사람은 잃어 버린 혼들입니다.

24-25절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이더니 그들이 또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대언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浸禮)를 주느냐? 하매](24-25). 요한의 답변을 들은 유대인들은 좀 더 깊이 그의 말을 생각해 보아야 했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음성이 무엇인지, 누구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면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복된 소식을 금방 깨우칠 수 있습니다. 요한의 대답은 언제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관습에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아예 침례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이 하는 말의 요점은 무슨 자격으로, 무슨 근거로 율법에도 관습에도 없는 백성들에게 물로 침례를 주는 이상한 짓을 하느냐? 는 것입니다. 구약의 침례라고 한다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면서 받은 침례가 있습니다. [또한 형제들아, 나는 /이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곧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모두 바다를 지나가며 모두가 구름과 바다 속에서 침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고](고전10:1,2).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세와 같은 대언자(메시야)가 오면 동일한 침례를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요한이 침례를 주자 그들은 요한을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엘리야 역시 요단강을 갈라서 건넌 적이 있었습니다(왕하2:8). 그런데 침례인 요한은 메시야도, 엘리야도, 모세와 같은 대언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왜 백성들에게 침례를 주어서 우리를 헷갈리게 하느냐? 왜 그런 위인들의 흉내를 내느냐?” 는 강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26-27절입니다.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너희 가운데 서 계시니 곧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라.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26-27). 침례인 요한은 아직 메시야를 만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는 메시야의 등장을 알고 있었고, “너희 가운데 서 계시니”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자신이 아닌 메시야에게 눈길을 돌리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1장에서만 무려 세 번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를 “내 뒤에 오시지만 나 보다 앞선 분”(1:15,27,30)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라면 요한보다 나이가 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요한보다 앞 설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요한의 사역을 계승한 계승자나 후계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라”고 계속 반복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그 출생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적으로 임했으며, 그의 이름은 천사가 지어 준 것이며, 어머니 엘리사벳의 뱃 속에서 이미 성령 충만을 경험했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왔을 때 태 속에서 기뻐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고, 오직 백성들의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도록 온 힘을 쏟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종의 자세입니다.

28절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침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바라에서 일어난 일이더라.](28).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바라는 지역은 요단강 동편을 말합니다.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