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독생자

말씀: 요 1:15-18 
 요절: 요 1:14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본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1:14)이었음을 증거했습니다. 이 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분이란 분명한 선포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때면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독생(only begotten)이란 말은 아버지가 낳은 자식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 때는 begot을 쓰고, 어머니 사라에게 태어난 것을 말할 때는 born을 씁니다. 독생(Only begotten)이란 말은 하나뿐인 아들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부인 사라에게서 난 아들은 오직 이삭 하나 뿐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아브라함의 독생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두라에게서 난 자식들 역시 아브라함의 자식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브라함의 독생자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독생자는 오직 이삭 하나였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바쳤으니 곧 약속들을 받은 그가 자기 독생자(獨生子)를 바쳤느니라.](히11:17).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많이 있지만 독생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창6:2,4, 욥16, 2:1, 38:7)이라 불리지만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호1:10)이라 불리지만 그들 역시 아버지의 독생자는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았지만(눅3:38) 결코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가 아닙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받았고(요1:12), 하나님의 자녀들(갈3:26)이 되었지만-[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음이요,](갈3:26)-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는 아닙니다. 독생자라 불리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15절입니다. [요한이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며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서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라, 한 것이 이분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니라.](15). 사도 요한은 자신의 증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침례인 요한의 증거를 소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침례인 요한은 증거하며 외쳤습니다. 그의 증거는 얼마나 분명하고 확신에 차 있었던지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침례인 요한은 성경에서 천사의 수태 고지를 받아 탄생한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름을 친히 지어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라. /주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느니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1:13). 침례인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습니다.

누가는 침례인 요한의 출생 배경과 출생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는데, 그의 출생에 대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그분보다 앞서 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예비된 한 백성을 준비하리라.](눅1:17). 요한의 사역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다”란 말은 회개하다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에서 첫 번째 설교가 “회개하라”였습니다. 요한은 하늘 왕국의 도래와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를 동시에 선포했으며, 회개의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르되,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3:2). 주님을 맞는 유일한 선결 조건은 회개와 그에 따른 믿음입니다. “회개하라”는 선포는 모든 전파자들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침례인 요한이 그러했고, 우리 주님 역시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비로소 선포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였습니다. 전도 여행을 떠났던 제자들 역시 [이르되,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막6:12)였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사도 바울 역시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이같이 무지(無知)하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행17:30). 회개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회개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만 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침례를 주면 서 한 일은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백성들이 그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참으로 요한이 회개의 침례로 침례를 주며 백성에게 말하되 너희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믿어야 하리라 하였으니 이분은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하거늘](행19:4). 요한은 주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누가 그리스도인지 알기도 전에 침례를 주면서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고, “그분을 믿어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이런 자세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요한처럼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차를 고치면서, 어떤 이는 침을 놓으면서, 어떤 이는 물건을 팔면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증거합니다. 기회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면서 ‘내가 전에 말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말합니다.

다시 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을 예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요한이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며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서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라, 한 것이 이분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니라.](15). 요한은 자신을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시국 강연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며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주인공이며, 전도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침례인 요한과는 달리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교회 사역의 보조 수단으로 삼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서와 모든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선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5:42). 빌립을 보십시오.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바로 그 성경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님을 선포하니라.](행8:35). 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에 살인자요,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으나 그가 주님을 만난 후로 평생동안 한 설교의 주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는 그가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주며 힘있게 유대인들을 확신시키되 공개적으로 그리하였음이더라.](행18:28). 우리가 침례인 요한과 같이 “예수님을 증거하며”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 보다 앞서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라’고 증거했는데, 이는 주님의 선재성 즉 주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증거한 것입니다. 요한은 분명 예수님보다 먼저 출생했습니다. 약 6개월 정도 앞선 나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자신보다 앞서시고, 먼저 계셨다고 증거함으로써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란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요한의 증언은 미가서 5:2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미5:2). 예수님은 세상이 있기 전부터 계셨으며, 처음이신 분이십니다. 이런 예는 주님의 자기 증거에서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매](요8:58). 백성들은 주님이 50세도 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b)란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이라고 표현한 것은 동양적 정서에서는 매우 파격적입니다. 특히 한국, 일본, 중국과 마찬가지로 유대 사회는 연령, 나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선배가 후배를 압도하는 문화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선임 사역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오시는 주님이 자신보다 앞선다고 말한 것은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결코 없습니다.

16절입니다. [우리가 다 그분의 충만하심에서 받았으매 은혜 위에 은혜니](16). 약간 오역임. all을 목적어로 취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그분의 충만하심 가운데 받았으니 은혜 위에 은혜로다](직역)라고 해야 함.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이 거합니다. [이는 아버지께서는 그분 안에 모든 충만이 거하는 것을 기뻐하시고](골1:19).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다 발견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두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기 때문이라.](골2:9).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 의, 지혜, 거룩함, 구속, 힘 등 모든 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성경에 “그리스도 안에”란 말씀이 150회가 넘게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지처럼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어야 하며, 몸의 지체처럼 전적으로 붙어 있어야 합니다. 신체의 어떤 부분도 몸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15:4-5).

주님 안에는 모든 보화가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고,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3).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교회를 통해 드러내시며, 교회를 충만케 하십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1:23). 교회는 오직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음으로 충만함을 덧 입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유기적 관계는 전적 의존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속 사역은 자신이 친히 모든 것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친히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4:10). 생각해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자신의 생명을 충만하게 하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신성한 권능으로 통해 하나님의 성품(벧후1:4)을 심어 주사, 생명의 유기적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뿌리의 진액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가지로 접붙임이 되어야만 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렇게 옮겨져야만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영적인 복은 주님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받습니다. 모든 은사 역시 그렇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힘이든, 지혜든, 무엇이든지 다 그분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받았으므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17절입니다.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라.](17). 여기서 아주 선명하게 대조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율법과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며,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율법의 2대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과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니라.](롬3:20). 율법을 통해 죄를 알게 되고,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訓育)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3:24).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바로 이런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은혜와 진리는 율법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말씀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옵니다. 은혜를 받기 원한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하십시오. 은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성령은 은혜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은혜의 영을 받을 수 있고,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온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롬5:2).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고 있습니다.

진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언제나 동반됩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주의 진리가 있고, 주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은 언제나 주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출34:6). 주님은 진리가 풍성하시며, 주의 말씀은 진리이시며,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오직 내가 진리의 성경 기록에 적힌 것을 네게 보여 주리니 이 일들에서 나와 함께 견디는 자는 너희의 통치자 미가엘 외에 아무도 없느니라.](단10:21)고 했습니다. 진리의 성경.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곧 진리의 영이시라.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나니 이는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아나니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임이라.](요14:17).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계십니다. 진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서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예수를 증거하지 않는 영은 진리의 영이 아닙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대신 다른 것을 증거한다면 그는 오류의 영이나 마귀의 영입니다. 진리의 영을 받은 도의 입에는 침례인 요한과 같이 그 입에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목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진리의 영은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요16:13).

주님은 자신이 진리 자체이시므로 모든 일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주]의 말씀이 옳으며 그분의 모든 일이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로다.](시33:4). 이런 까닭에 진리가 배제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며 진리가 배제된 은혜는 주의 은혜가 아닙니다. 진리가 없는 예배는 참된 경배가 아닙니다. 성경도 없이 예배를 보는 교인들이 넘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진리가 없는 예배는 참된 경배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요4:23-24).

다시 17절입니다.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라.](1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만 미치는 것들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진리로 주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들을 깊이 생각하여 오직 그분을 두려워하며 너희 마음을 다하여 진리로 그분을 섬기라.](삼상12:24).

진리가 없으면 주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진리로 주님을 찬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거룩한 전(殿)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仁慈)와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음이니이다](시138:2).

진리가 없으면 주님을 배울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오니 주의 진리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가르치소서.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25:5).

진리가 없으면 우리는 소멸되고 맙니다. 주님은 진리로 나를 보존하십니다. [오 [주]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오며 주의 인자와 주의 진리로 항상 나를 보존하소서.](시40:11).

진리의 또 다른 역할은 심판입니다. 주님은 진리로 심판하십니다. [그분께서 내 원수들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진리로 그들을 끊어 버리소서.](시54:5). [[주] 앞에서 기뻐하리니 이는 그분께서 오시되 땅을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이로다. 그분께서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자신의 진리로 만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96:13). 주님은 진리로 우리를 거룩히 구분하십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이를 통해 볼 때 진리와 연관되지 않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경배, 찬양, 인도, 가르침, 섬김, 보존, 심판 등 모든 것이 주의 진리로 말미암습니다. 이는 은혜와 진리가 예수님을 통해 왔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자(獨生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18).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육안은 하나님을 보는 순간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임이니라.](출33:20). 우리는 꿈에라도 주님을 한번 뵙고 싶어 하지만 그 소원은 육신을 입고 있는 이 땅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 대하여 증거하셨기 때문이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으며](요5:3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보았다,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느 조사 기관에 따르면 이런 부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서울에만도 1,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말은/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이라.](요6:46).

구약에서 하나님을 보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주의 천사를 통해 주님을 보는 방법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등이 이런 방식으로 주님을 보았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 역시 이런 방법으로 보았고, 마노아, 기드온 등도 이렇게 주님을 보았습니다. 둘째, 이사야나 에스겔, 다니엘 등과 같이 환상을 통해서 영안에서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셋째, 사도들이나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아무도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상 가운데 주님을 뵈었지만 그의 증언은 이렇습니다.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전6:16).

하나님은 주의 천사를 통해 나타나 보이시기도 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은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심으로써 입니다. 독생자께서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독생자로서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골로새서 1:15,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나신 분이시니](골1:15).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고후4:4b).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입니다.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히1:3).

하지만 현재 우리는 사도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마저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우리는 주님을 보기 위해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되느니라.](요일4:12).

다시 18절입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자(獨生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18). 독생자란 표현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란 말인데 하나님도 아들이 있는가? 란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육체적으로 하나님께 태어난 분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신성을 가장 잘 나타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사9: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여 있고 그의 이름은 기묘라, 모사라, 강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임이라.](사9:6).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완전히 동등하신 분이시며,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 이렇게 셋이지만 이 셋은 하나입니다(요일5:7). 셋이 셋이지 어떻게 하나냐고 물으면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대답해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셋이 하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답변입니다. 셋이 하나란 진리는 결코 비논리적이거나 이상야릇한 신학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비록 하늘이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어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으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고전8:6-7).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이 둘은 각각 다른 신격이시면서도 같은 분이십니다. NASB같은 성경에서는 독생자(Only begotten Son)을 독생하신 하나님(only begotten God)으로 변개해 버렸는데, 이로써 하나님은 둘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이란 두 가지 칭호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이 완전한 사람이란 뜻이듯이 하나님의 아들 역시 완전한 하나님이란 뜻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상식적인 진리입니다. 두 구절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이는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기 때문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중재자이신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주님은 사람을 대신한 중재자이십니다. [이제 중재자라 함은 하나만의 중재자가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갈3:20). 중재자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을 드러내시고, 선포하셨습니다.

18절 말씀을 다시 주의해서 보시면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라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의 품속에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동시에 두 곳에 계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소 부재는 요한복음 3:13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요한은 매 구절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독생하신 아들이란 점에서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셨지만 정한 때가 되어 아버지에 의해 독생하시므로 하나님을 밝히 드러내시는 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