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말씀: 요 1:29-39 
요절: 요 1:29

침례인 요한의 사역은 메시야를 증거하는 것이요,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며,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역에 신실했습니다. 29절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29). 이 구절은 창세기 22:8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으로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창22:2). 이 산은 주의 산이라 불리는 곳인데(창22:14) 이곳은 후에 솔로몬의 성전이 들어선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그곳이 바로 솔로몬의 성전의 어린 양을 잡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 [주]의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니 이곳은 전에 [주]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족속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예비한 곳이더라.](대하3:1).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놀랍기만 합니다. 모든 것이 정확하게 일관성있게 관통합니다.

창세기 22:7-8을 보십시오. 이삭은 아버지에게 번제용 어린 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어린 양으로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하매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를 보시거니와 번제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니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 헌물의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 하고 그 두 사람이 함께 가서] (창22:7-8).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의 본문을 통해서 이 구절의 이중적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And Abraham said, My son, God will provide himself a lamb for a burnt offering : so they went both of them together.](창22:8).-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번제 헌물로 준비하실 것임이라.-직역. 이 진리는 킹제임스 성경에만 계시되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the lamb)이 아닌 숫양(a ram)을 준비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말이 예언적 의미가 있음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제거하는 어린 양이십니다. 구약의 제단에 드려졌던 수많은 양들은 결코 사람들의 죄를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이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출34:7). 주님은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그것은 항상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제거하는 어린 양이 올 때까지 임시적이었습니다. 성전의 놋 제단 위에 뿌려진 짐승들의 피는 결코 죄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히10:4). 하지만 주님은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완벽하게 제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어떤 피입니까? 염소와 송아지의 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피입니다. 주님은 짐승의 피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브리서 9:12에 이르기를,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대속(代贖)을 얻으셨느니라.](히9:12). 여기서 자기 피란 주님의 피가 하나님의 피란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게 하셨나니](행20:28). 이 피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의 피입니다.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9). 완전무결한 피입니다. 이 피는 죄를 제거하는 피요, 대속하는 피요, 죽은 행위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피이며, 정결하게 하는 피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침례자 요한이 증거한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이런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으니 그분께서 나보다 앞서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라, 한 것이 이분을 가리키는 것이라](30). 요한은 분명 예수님보다 6개월이나 먼저 태어났지만 주님이 자신보다 먼저 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1장에서만 세 번이나 이 말을 반복하여 증거하고 있는데, 이는 그분이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미가서 5:2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니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믹5:2). 요한은 이전에 했던 증거를 이제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증거한 것입니다.

31절은 자신이 왜 물로 침례를 주는지 목적과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분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려 함이라, 하니라.](31).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물로 침례를 줌으로써 온 이스라엘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모았고, 자신에게 모인 눈길을 다시 주님께로 향하도록 자신의 입술로 증거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을 드러내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추구하는 삶은 비참해지지만 자아를 낮추고, 숨기는 삶은 언제나 높임을 받습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는데 이 침례는 오늘날 성도들이 받는 물 침례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요한의 침례는 구원의 침례가 아닙니다. 요한의 침례는 구원받은 후에 신앙 고백으로서 행해지는 침례가 아니라 구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침례였습니다. 요한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예수를 알지 못했고, 아직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요한의 침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한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복음을 믿고, 주의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8:25, 19:3에는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었던 한 무리가 나옵니다. [이 사람이 전에 {주}의 길을 배워 영이 뜨겁고 {주}에 관한 것들을 부지런히 말하고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더라.](행18:25). 이 때 바울에게 성경을 배웠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길을 더욱 완전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행18:26).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후에야 온전해졌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요한의 침례라, 하매 바울이 이르되, 참으로 요한이 회개의 침례로 침례를 주며 백성에게 말하되 너희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믿어야 하리라 하였으니 이분은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하거늘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행19:3-5). 요한의 침례는 회개의 침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드러내고, 그분을 믿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받는 물 침례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고백입니다. [이것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또한 우리를 구원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라.)](벧전3:21). 우리는 침례를 받음으로써 주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32절입니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그분 위에 머물렀더라.](32). 여기서 우리 주님께 임한 성령은 비둘기 같이 내려오신 반면 사도행전에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모습은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나서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에 가득하며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진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와 앉더니](행2:2-3). 동일한 성령이신데 왜 이리도 임하는 모습이 다릅니까? 주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더러움이나 간사함이 전혀 없으신 순수한 분이시기에 성령은 비둘기같이 내려 오사 임했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육신과 마음 안에 옛 성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에 성령은 불같이 임하사 모든 더러움을 태우고 소멸하신 것입니다.

비둘기는 노아의 방주에서 땅에 홍수가 가득할 때 내 보내어서 물이 내려갔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이때 비둘기는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노아 역시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마음 속에 있던 비둘기는 수 세기가 지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비로소 쉴 곳을 찾고, 그곳에 내려앉았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순결을 상징하고 교회를 상징합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이용해 먹는 로고이기도 합니다.

33절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고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성/령이 내려와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바로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인 줄 알라, 하셨기에](33). 요한은 자신의 침례가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임을 말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성령 침례는 흔히 오순절, 은사주의 교회에서 거듭남과는 별개로 받는 특이한 체험이나 은사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없는 소리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었을 때 방언도 예언도 할 줄 몰랐고,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솟지도 않았고, 머리에는 후광이 그려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성령 침례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으로 성령 침례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하여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요, 곧 /한 성령에 의하여/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전12:13). 예수를 믿은 후에 성령을 달라고 외치는 사람보다 더 한심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판별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말하는 자는 아무도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예수님을 믿는 마음으로 {주}라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성령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세우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고후1:21-22).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놀라운 은혜를 얻었는데 이것이 모두 믿음으로, 값없는 은혜를 통해 주신 성령의 역사이며, 우리 안에 계시며 인도하시고 조명해 주시는 까닭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그러나 너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하여야 하리라.](요일2:27).

성령 침례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침례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주님은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는데, 이것을 성령의 인침, 성령의 보증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셔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계시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곧 진리의 영이시라.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나니 이는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아나니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임이라.](요14:16-17). 성령 침례를 받으신 분들은 성령 안에서 살며, 성령 충만을 받아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불로 침례를 주신다는 것은 심판을 말합니다. 불은 언제나 심판을 의미합니다. [곧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사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데기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로 태우시리라.](마3:12). 불은 지옥을 나타냅니다. 물 침례에서 물이 문자 그대로 물을 나타내듯이, 불로 침례를 주신다고 말할 때 불 역시 문자 그대로의 불을 말합니다. 결코 상징이나 비유가 아닙니다.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임이라.](막9:48-49). 불로 침례를 받는 대상은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시리니](살후1:8). 사람들은 문자적인 지옥에 대해서 믿으려 하지 않는데, 이는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이 이곳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미 옛적에 불 심판을 통해서 본보기를 보여 주셨는데, 지옥은 소돔과 고모라가 불탄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불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 도시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음행에 내어 주고 낯선 육체를 추구하다가 영원한 불로 보복을 당하여 본보기가 되었느니라.](유1:7).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증거한 후에 요한은 한 번 더 그분이 누구신지를 증거합니다. 34절입니다. [내가 보고 이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34). 요한은 성령께서 머무는 것을 보고 즉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고 믿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의 소임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증거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5-37절은 요한이 맺은 사역의 열매입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들 중의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거니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 하매 그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거늘](35-37). 요한은 다시 한번 예수님을 “보라 하님의 어린 양이로다!”(36) 증거 했고, 요한의 제자들이 그 증거를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증거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기에 충분한 증거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의 증거를 통해 곧 바로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평소 요한이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요한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제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언제든지 예수님이 등장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아닌 남을 따르도록 가르친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38절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그들이 따르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랍비여, 어디에 거하시나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님이라.)](38).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물었습니다. 주님은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들에게 먼저 이것을 묻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담에게는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가인에게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물으시는 것은 우리에게 답변을 요구하시므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연해 보이시는 듯한 질문을 자주 하셨습니다. 주님은 38년 된 마비 환자에게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요5:6)고 물으셨습니다. 눈먼 맹인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마20:32)고 물으셨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에게 “무엇을 원하느냐?”(마20:21)고 물으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병사들을 이끌고 왔을 때 주님은 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마26:50)고 물으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알고 싶어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묻는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13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들어오사 자기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 곧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 15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마16:13-15). 주님은 때로 성경에 관한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무지를 폭로하고, 진리를 선포하신 적도 많으십니다. 예를 들면 주님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하니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면 어찌하여 다윗이 영(靈)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며 이르되,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불렀은즉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마22:42). 이런 질문은 너무나 핵심을 찌르는 질문인지라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에 답변하시는 분이시지만 또한 모든 것을 물어 보십니다.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고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이 질문은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어떤 이는 병이 낫고자 주님을 따르고, 어떤 이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주님을 따르고, 어떤 이는 복을 받기 위해 주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침례인 요한의 제자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즉시 ‘랍비여, 어디에 거하시나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이는 제자가 찾아가서 머물면서 배우겠다는 뜻입니다. 즉 제자가 되겠다는 청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39절,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와 보라, 하시더라. 이에 그들이 가서 그분께서 거하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머무르니 이는 때가 열 시쯤 되었음이라.](39). 이 둘의 이름이 사도 요한과 안드레입니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40-41절입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더라. 그가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이르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니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40-41). 우리는 구약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형제가 가인과 아벨이란 사실을 봅니다. 이 둘은 형제였고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지만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신약 성경에 처음 나오는 형제는 안드레와 베드로입니다. 안드레는 형제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거 했고, 그를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이 둘의 선명한 대조는 언제나 우리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육신의 형제, 자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주님을 증거 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가인과 아벨과 같은 형제냐?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형제냐? 안드레는 이날 전도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한 인물을 교회사에 우뚝 세우게 됩니다.

복음을 전한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후에 저 하늘에 갔을 때 내가 전한 형제를 만난다면 그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런 일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형제들은 “우리의 서신”(고후3:2-3)이라 했고,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환희의 왕관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 있을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2:19-20).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들 곧 나의 기쁨이요 왕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굳게 서라.](빌4:1).

42절은 안드레가 시몬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장면입니다. 주님을 만난 안드레는 곧 바로 증거와 구령으로 이어졌습니다. 구약 성경에 처음 나온 형은 동생을 돌로 쳐 죽인 살인자였지만 신약 성경에 처음 나온 형제는 동생을 생명으로 인도한 구령자였습니다. [그가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매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인즉 앞으로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라.](42). 주님은 시몬을 보시고 게바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셨습니다. 개역 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마태복음 16:17,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나니 ...](마16:17). 바요나란 요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시몬이란 뜻은 ‘들음’(hearing)이란 말입니다. 게바는 돌인데 이는 로마 캐톨릭의 주장처럼 반석이 아닙니다. 반석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은 빌립을 부르셨습니다. [그 다음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제 빌립은 벳새다 사람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도시 사람이더라.](43). 빌립 역시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며, 어부였습니다. 벳새다란 지역은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으로써 주님이 훗날 많은 사역을 행하시는 곳입니다. 소경을 고치시기도 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곳도 벳새다였습니다. 빌립은 계산력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을 때 암산으로 2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뢰었습니다(요6:7). 빌립이 그분께 대답하되, 각 사람이 조금씩 받을지라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부족하리이다, 하니](요6:7). 빌립은 논리가 정연한 사람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그에게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대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으니 곧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님이시니라, 하매](45). 그는 구약을 가지고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안드레의 체험에 근거한 증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기록에 근거한 논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증거는 매우 불완전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라든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해야 할 부분에서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주님은 육신으로 마리아의 아들일 수는 있어도 요셉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혔고,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한 모친 마리아를 정정해 주셨습니다(눅2:48). 불신자들이 주님을 폄하할 때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을 썼습니다(눅4:22, 요6:42). 그의 증거는 곧 바로 반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6절입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니 빌립이 그에게 이르되, 와 보라, 하니라.](46). 나다나엘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났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음을 지적했습니다. 주님은 나사렛 사람이라 불렸지만 성경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빌립은 즉시 논쟁을 중단하고 ‘와 보라’고 했습니다. 직접 와서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말문이 막힐 때 빌립이 사용했던 방법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대로 주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거짓이 없도다! 하시니](47). 친구의 초청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 나다나엘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거짓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약의 표현대로라면 복있는 사람입니다. [영(靈) 안에 간사함이 없고 [주]께서 불법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32:2), [진실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곧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도다.](시73:1).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란 말씀은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이요, 증거를 받아 들이는 사람이며,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구약 성경을 통해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렸고, 결국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육신의 아브라함 자손이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메시야를 소망하고 기다리며, 그분께 나아오는 사람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는 마음에 거짓이 없었습니다.

48절입니다. [나다나엘이 그분께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밑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 하시니](48). 여기서 주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심을 밝히 선포하셨습니다. 빌립이 부르기도 전에 이미 주님은 나다나엘을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빌립이 부르는 장면, 대화하는 이야기도 다 보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건 주님은 우리를 이미 다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주님은 다 보십니다. 시편 139편은 주님의 이런 능력과 성품을 노래한 장입니다.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살피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나의 길과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이는, 오 [주]여, 보소서,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나를 앞뒤로 에워싸시고 주의 손을 내 위에 얹으셨나이다. 이런 지식이 내게 너무 놀라우며 높아서 내가 능히 거기에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내가 주의 눈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아침의 날개들을 취하여 바다 맨 끝 지역들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1-10). 저와 여러분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이런 불꽃같은 눈을 의식한다면 죄를 짓는 나 자신이 한없이 두려울 것이며, 어려움과 위험에 처했을 때 든든한 힘이될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의 첫 대면에서 빌립의 증거가 사실임을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 들였고, 고백했습니다. [나다나엘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선생님은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 하매](49). 나다나엘을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임을 고백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한다면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왕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다나엘이 구약에 상당히 정통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밑에서 보았다고 하므로 믿느냐? 네가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보리라, 하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50-51). 나다나엘은 주님과의 첫 만남에서 강렬한 감동과 인상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 정도에 놀라느냐? 앞으로는 이 보다 훨씬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후로는 병자가 일어나고, 마귀들이 내 쫓기고, 복음이 전파되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특별히 주신 약속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제자들)가 보리라’한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야곱이 꾼 꿈에 근거한 말씀입니다(창28:12). 실제로 제자들은 주님이 천사들과 함께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또한 재림하시면 이런 장면이 실재로 연출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12번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란 증거를 합니다.

  • 주님은 태초에 계신 말씀이셨습니다(1). 이 말씀은 육신이 되셨습니다(14).

  • 주님은 세상의 빛이셨습니다(7-9). 이로써 세상은 주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 주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18). 아들들은 많이 있을 수 있지만 독생자는 유일무이합니다.

  •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34).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이 땅의 왕권과 지배권을 지녔음을 말합니다.

  • 주님의 이름은 예수(Jesus)입니다. 이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란 의미입니다(45).

  • 주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49). 이는 다윗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통치자이심을 말합니다.

  • 마지막으로 사람의 아들(인자)입니다(51). 사람의 아들이란 우리의 아들, 우리의 본성을 입은 것을 말합니다.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히2:16).

  •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41). 그리스도란 칭호는 기름부음받은 자란 뜻입니다. 주님은 왕과 제사장과 대언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 주님은 메시야이십니다(41). 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약속된 구원자란 말입니다.

  • 주님은 선생님(Master)이십니다(38). 주님은 우리의 주인(Owner)이십니다.

  • 주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28). 이는 우리의 속죄 제물로 오셨음을 말합니다. 성전 제단에서 아무리 많은 양의 피가 흘러도 그것으로 죄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주님만이 죄를 제거합니다.

  • 예수님은 주님(Lord)이십니다. 이는 하늘과 땅의 주시란 말입니다(23).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