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물을 포도즙으로

말씀: 요 2:1-11
요절: 요 2:11

오늘은 예수님이 행하신 공식적인 첫 번째 표적이 나옵니다. 흔히 가나의 혼인 잔치로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 사건은 모세가 행한 첫 번째 이적인 물을 피로 바꾼 사건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율법은 선포했고, 주님은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모세는 물을 피로 바꾸어 온 세상에 저주와 심판을 선포했고, 주님은 잔치 집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성령을 상징하거나 말씀의 물을 나타냅니다. 물이 사람과 관련될 때는 육체적 출생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어머니의 양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너는/ 네 물 저장고에서 물을 마시며 네 우물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네 샘들이 널리 퍼지며 여러 거리에서 강물이 되게 하되 오직 네 것이 되게 하며 너와 함께하는 낯선 자들의 것이 되지 못하게 하라. 네 샘으로 하여금 복되게 하며 또 젊을 때 /취한/ 아내와 더불어 기뻐하라.](잠5:15~18). 성경은 아내를 샘이라고 말하며 자식은 그 샘에서 나오는 우물로 표현됩니다. [내 누이, 내 정혼자는 둘러싸인 동산이요, 닫힌 옹달샘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2). 주님께서 처음 창조하실 때 물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생명이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은 생명이 있어서 움직이는 피조물(被造物)과 땅 위 하늘의 열린 궁창에 나는 날짐승을 풍성히 내라, 하시고](창1:20). 타락한 사람들은 물 대신 술을 원하지만 술을 마신 사람들이 가장 갈급하게 찾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물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의 원천을 지으신 분,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지 않고, 버림으로써 늘 갈증을 느끼며 삽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어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있고](1). 사흘 째란 말은 요한복음 자체에서만 기준으로 한 말입니다.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후에 40일간 광야에서 금식을 하셨고,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기술된 첫째 날은 침례 요한의 증거를 받으셨고, 요한의 제자 두 사람과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둘째 날은 빌립을 만나셨고 빌립이 데려온 나다나엘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오늘은 셋째 날입니다. 성경에서 셋째 날은 특별한 영적 의미를 많이 내포합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셋째 날입니다. 아브라함은 셋째 날에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도착했습니다(창22:4).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서 셋째 날 주님이 강림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셋째 날을 예비하고 너희 아내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하니라. 셋째 날 아침에 천둥과 번개와 짙은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영에 있는 온 백성이 다 떨더라.](출19:15-16). 셋째 날은 주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하루가 천년같다는 말씀(벧후3:8)에 따르면 2천년이 지난 지금이 바로 셋째 날에 해당할 것입니다.

셋째 날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각종 채소들과 열매 맺는 나무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신 날입니다. 지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셋째 날이 되어야 완전한 구속을 받습니다. 땅과 땅의 모든 피조물은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저주아래 신음하고 있습니다.

셋째 날에 주님은 가나의 어떤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셋째 날에 하나님과 다시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사54:4,5, 호2). 호세아 6:1,2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 이는 그분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틀 후면 그분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셋째 날에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리니 우리가 그분의 눈앞에서 살리로다](호6:1,2). 이스라엘은 2천년동안 찢기고, 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이는 천년 왕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니 당황하지 말라. 네가 젊은 시절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를 만드신 이가 네 남편이기 때문이니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주]시니라. 그분은 네 구속자(救贖者)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니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시리라.](사54:4~5).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시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남편이십니다.

셋째 날이란 곧 주님의 부활하심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날이요, 주님과 혼인하는 날이며, 천년 왕국이 건설되는 날이며, 하나님께서 이 땅을 완전히 구속하여 의와 평강이 넘치는 날입니다. 주님이 맨 먼저 혼인 잔치 집에 참석하신 이유는 이런 깊은 영적 의미를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도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더니 그들에게 포도즙이 떨어지매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분께 이르되, 그들에게 포도즙이 없다, 하니](2-3). 여기서 흔히 포도주(알콜)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포도즙은 기쁨을 상징하고,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분께서 가축이 먹을 풀과 사람이 쓸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음식이 나게 하시되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즙과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심장을 강하게 하는 빵이 나게 하셨도다.](시104:14~15). 포도즙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즙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올라서리요? 하니라.](삿9:13). 혼인 잔치 집에는 다른 어떤 음식보다 포도즙을 넉넉히 준비해야 합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즙이 떨어진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참석하신 혼인 잔치 집에 포도즙이 떨어진 것은 1:11절과 연관시켜 볼 때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예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포도즙이 떨어진 것처럼 기쁨이 없는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은혜가 메마른 성도들의 특징은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명령 가운데 하나는 '항상 기뻐하라'(살전5:18)입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기쁨이 있는 것이 성도들의 특징입니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롬5:2-4).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을 알고, 주님이 주신 성령이 있기 때문에 환란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억지로 기뻐할 수 있겠지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은 매를 맞은 후에 기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기쁨은 성도들의 생활 특징입니다. 참된 신앙과 그렇지 않는 신앙의 확연한 구분은 기쁨이 있는가? 입니다.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즙이 우리 안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언제나 기쁨은 넘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는 영적 교제를 통해서도 기쁨을 누립니다. [또 날마다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나누면서 단일(單一)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으며](행2:46). 성도는 말씀을 전한 후에나 기도한 후에나 교제한 후에나 환란 가운데서나 핍박을 받은 후에나 언제나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포도즙이 없다, 하니](3)란 마리아이 말은 잔치 집의 연회 분위기가 파(破)할 위기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드라이브를 하는데 프리웨이 위에서 개스가 떨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성도의 신앙 생활에서 기쁨을 빼앗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언제 우리 안에는 포도즙이 떨어지게 됩니까? 외식, 탐욕, 형식주의 등에 빠질 때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령의 은혜와 자발적인 섬김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즉시 시험에 들고, 불평을 일으킵니다. [오직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복음을 위탁받은 대로 우리가 말하노니 이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거나,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려는 마음이 모두 외식주의, 형식주의입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갈1:10).

포도즙이 떨어지는 또 하나의 유형은 육체를 신뢰할 때입니다. 자신을 신뢰하고 육체를 신뢰할 때 우리 안에 넘치던 주의 은혜는 급격히 소멸하며, 성령은 완전히 사라진 듯이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살전5:19). 이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께 [그들에게 포도즙이 없나이다] 라고 보고했는데, 사람들은 이 부분을 두고 마리아의 주인 정신에 대해서 설교하느라 시간을 다 써버립니다. 마리아는 손님이지만 손님으로 가만히 앉아서 음식을 즐긴 것이 아니라 잔치 집에 무엇이 부족한 것이 없는가? 어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없는가?를 부지런히 살펴 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씀의 핵심은 마리아가 왜 포도즙이 떨어진 사실을 연회의 주인이나 신랑이 아닌 예수님께 들고 나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브리엘을 통해 계시를 받았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란 말씀을 들었습니다(눅1:30-32). 예수님께 나아온 마리아의 모습은 예수님을 믿었던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적과 능력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불신자들의 특징은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시오. 당신이 누구인지 드러내 보이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인데, 마리아는 공생애 시작의 처음에 침례인 요한의 증거를 받았던 주님이 곧 바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와 영광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능력을 보여 주시죠?'하는 것과 한 가지로 영적으로 볼 때는 불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그들에게 포도즙이 없나이다]라고 사람이 하나님을 지도하려고 든 경우입니다. 우리는 때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마리아처럼 주님께 나아가 '우리게에 돈이 없나이다. 우리에게 지혜가 없나이다. 방법이 없나이다''등 을 연발합니다. 그냥 모든 필요를 감사함으로 주님께 알려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빌4:6), 불평과 원망의 보고서를 올리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일은 주님이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4:38) 하며 주님을 흔들어 깨우는 제자들처럼 마리아는 그렇게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는 우리의 인간적 해석이 아니라 주님의 답변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믿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불신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나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적잖이 방해를 하기도 했으며, 주님이 설교하시는데 찾아 오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형제들과 어머니가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그분을 부르니 무리가 그분 주위에 앉았다가 그분께 이르되, 보소서,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선생님을 찾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냐? 하시고 자기 주위에 앉은 자들을 둘러보시고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이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라, 하시더라.](막3:31~35).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불만이 잘 드러난 곳은7:1-4입니다. [이 일들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인들의 거주지에서 다니려 하지 아니하시더니 이는 유대인들이 그분을 죽이려 하였음이더라. 이제 유대인들의 명절인 장막절이 가까우므로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이르되, 여기를 떠나 유대로 들어가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하소서. 이는 스스로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은밀히 일을 행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니이다. 이 일들을 행하시려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요7:1~4). 이들은 주님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을 촉구했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잘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7:5). 불신의 특징은 믿음이 있는체, 주님을 인정하는체 하면서 무엇인가를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촉구합니다. 마리아는 감히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을 시키고 있는데 이는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즉시 마리아의 이런 잘못된 요구를 시정해 주셨습니다.

[[들에게 포도즙이 없나이다] 라고 할 때 우리는 포도즙을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관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기록된 사건을 모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가르침을 주는 책임을 생각할 때 포도즙이 떨어져 포도즙을 요구한 것은 곧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요구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마리아는 이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지만 성경적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하시매](4). 주님은 모친 마리아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정확히 아셨고,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여자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이 말에 예수님의 예절을 문제 삼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잘못된 접근을 바르게 잡아 주신 것입니다. 육신의 모친으로서 접근했다면 어머니여!가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접근했을 마리아는 “여자여!”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자여!가 3인칭 극존칭이니 하는 말은 예의없는(?) 주님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 주려는 경건한 죄인들의 선한 의도일 뿐 진리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요, 하나님의 어머니로 아는 캐톨릭 교도들에게 이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겠지만 주님은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란 말은 더욱더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영광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때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의 때, 그의 때라고 할 때는 언제나 주님의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나 육신의 형제들은 지금 당장, 언제라도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을 선포하고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를 원했지만 주님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때는 언제입니까? 3년 반 후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뭔가 모르고 무리한 주문을 한 것입니다. 이는 책망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때에 관해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완전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요7:8). 주님의 형제들은 주님의 때가 이르기 전에 뭔가를 하도록 계속 주문했고, 요구했습니다.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침례인 요한의 증거를 받고, 제자들이 생기고, 뭔가 될 것 같은 마음에 주님이 메시야로서 일을 해 주기를 바란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포도즙 사건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요12:23). 곧 십자가에서 죽을 때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헬라인들에게 한 알의 밀알의 진리를 가르치시며 한 이 말씀은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이제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 때가 이르러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자기 때란 언제입니까? 유월절 어린 양으로 잡혀 죽을 바로 그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해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의 아들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

[그분께서 이르시되, 도시로 들어가 이런 사람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네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마26:18).

마리아는 이런 '주님의 time table'에 대해서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시고 오직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촉구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때가 되어 일하십니다. 주님은 때가 되어 이 땅에 오셨고, 때가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갈4:4). [이는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이라.](롬5:6). 주님께서 모친 마리아에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란 말씀을 하신 것은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가장 정확한 답변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분의 어머니가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5).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종들에게 매우 위대한 한 마디의 설교를 남겼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장 포도즙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은 받지 못했지만 언젠가 만들어 주실지도 모른다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마리아의 기대를 묵살하지 않으셨습니다. 5절을 영적으로 적용하자면 우리는 순종의 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오늘날 성도들이 금과옥조로 여겨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유를 달지 말고,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말씀하시는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옵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마리아는 지시자의 입장이 아니라 순종해야 하는 종의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6-7절입니다. [거기에 유대인들의 정결하게 하는 관례(慣例)에 따라 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더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물항아리들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그들이 아귀까지 채우니](6-7). 물 두 세통 드는 항아리는 오늘날 이곳 단위로 하면9-10갤론 정도의 양을 말합니다. 주님은 종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종들은 알아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해서 움직이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물 항아리들에 물을 채우라” 말씀하셨고, 종들은 대충 반만 채우거나 눈 가림으로 하지 않고 아귀까지 가득 채웠습니다. 종들이 일하는 태도는 이렇습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60), [종들아, 모든 일에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單一)한 마음으로 하라.](골3:22). 이들은 과연 말씀대로 행했고, 적당히 채운 것이 아니라 아귀까지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처음에 성경을 배울 때 이들의 자세를 120% 순종이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종들로 자처하는 성도들의 일하는 자세여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적용하면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종들이 해야 할 일은 빈 항아리 같은 우리 마음에 말씀을 채우는 일입니다. 말씀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코 보혈(포도즙)을 죄인들에게 전해 줄 수 없습니다. 항아리가 여섯 개였다는 것은 역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6은 인간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6일은 인간이 노동을 해야 하는 날입니다. 여섯 개의 물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은 적지 않는 수고를 필요로 합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는 일 역시 수고가 필요합니다. 말씀의 물로 채워진 성도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피로 온전하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자에게 가져다 주라, 하시매 그들이 가져다 주었더니](8). 주님은 항아리에서 떠서 잔치를 맡은 자에게 가져다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물을 항아리에 채우는 일보다 좀 더 힘든 일이 물을 떠서 잔치를 맡은 자에게 가져다 주는 일입니다. 연회장이 물을 가져 오라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물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예수님이 시킨대로 가져다 주었습니다. 순종의 전형적인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항아리에 가득한 포도즙은 하객들이 넘치도록 먹어도 남을 양입니다. 이것이 포도즙이 아니고 포도주였다면 혼인 잔치는 완전히 술판이 벌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는 하바국 2:15-16절에 따르면 범죄 행위입니다. [화 있을진저, 자기 이웃에게 마실 것을 주되 자기의 /술/ 부대를 주고 또 그를 취하게 하며 그들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자 하는 자여! 너에게 영광대신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포피(包皮)를 드러낼지어다. [주]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요, 수치스럽게 토한 것이 네 영광 위에 임하리니](합2:15~16).

9-10절입니다. [잔치를 주관하는 자는 포도즙이 된 물을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그 물을 떠온 종들은 알더라.) 이에 잔치를 맡은 자가 신랑을 불러 이르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즙을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즙을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9~10). 여기서 흔히 포도주라고 번역된 wine에 대해서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wine은 new wine과 old wine이 있습니다. new wine은 새 술이라고 해서 흠정역 성경에서는 모두 포도즙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포도즙은 포도주가 아닙니다(사65:8, 창40:1, 신32:4참조).

포도즙은 발효가 되기 전의 상태로서 쥬스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서 새 포도즙을 찾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게 하지 말라. 거기에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해 그와 같이 행하여 그들을 다 멸하지 아니하고](사65:8). 포도송이에 와인(wine)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술을 만들어 주셨다는 것은 상상을 불허하는 일입니다. 잘못된 성경을 통해 잘못된 지식과 믿음을 갖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른 성경이 아니면 모두 주님이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이 졸지에 술을 만드신 일이 될 것입니다. 술은 발효가 되기 때문에 순수한 피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피는 흠없고, 점 없는 순수한 어린 양의 피입니다. [너는 포도주가 붉거나 잔에서 제 빛깔을 내거나 스스로 똑바로 움직일 때에 그것을 바라보지도 말지니라.](잠23:31).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술을 권하지 않습니다.

다시 9절을 보십시오. [잔치를 주관하는 자는 포도즙이 된 물을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그 물을 떠온 종들은 알더라.) ...](9). 물이 포도즙이 된 사건은 마리아도, 제자들도, 신랑도 그 누구도 아닌 물을 떠 날랐던 종들만 알았습니다. 종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사람이며, 그 피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의 사역을 아는 사람은 지위 고하, 신분, 학력과는 무관합니다. 대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본 사람만이 능력의 근원과 출처를 압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주님께 더 많이 순종해 본 사람입니다.

10절은 모든 현대 역본들에서 술취함을 정당화하는 구절로 변개시켜 놓았습니다. [이르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즙을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즙을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10).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란 말을 사람들이 다 "취한 후에"라고 함으로써 술에 잔뜩 취한 회당장이 정신이 없이 혀가 꼬인 채 주정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 놓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술을 마시고 취하고 싶은 욕망을 성경 속에 그대로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맥주, 양주, 소주를 들이 마시면서 이 구절을 들이대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는 변개된 성경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회당장은 자신이 마시는 포도즙의 출처도 모른채 마셨지만 정곡을 찌르는 세상 이치를 한 가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르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즙을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10a). 이것이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처음에는 잘 하다가 약간 지나면 더 못한 것, 나중에는 형편없는 것을 내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무엇이든지 처음에는 좋은 것, 최고의 것으로 홀립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엉망이 됩니다. 반면 주님은 인간들이 엉망이 될 때 쯤 가장 좋은 것을 내 놓으십니다. 내 인생의 최악의 순간에 주님을 만나면 최상으로 변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으니라.](11).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의 증거를 통해, 개인적인 만남과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더욱 확실히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적은 믿는 이들에게는 더욱 강한 확신을 주고, 불신자들에게는 헛된 망상을 줍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을 현재 우리의 세대에 적용해 봅시다. 포도즙이 떨어진 군중들은 갈증을 느끼며 기쁨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들 가운데 계시며 이들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주님은 값없이 포도즙을 주셨습니다. 빈 물 항아리는 텅빈 우리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딱딱하지만 텅 비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질그릇에 비유합니다(고후4:7, 딤후2:20-21). 죄인들의 마음은 밖으로 볼 때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속은 그렇게 텅비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말씀의 물을 채워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말씀의 물을 부으시고, 그것을 기쁨의 포도즙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말씀을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골3:16). 또한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엡5:18). 물이 포도즙이 됩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말씀이 곧 성령입니다. 물은 무엇인가를 씻습니다. 말씀의 물은 죄를 씻습니다(엡5:26, 요15:3). 종들이 물을 채우는 행위는 말씀을 채우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행한 기적이 물을 포도즙으로 바꾸는 기적이었다면 이는 구원이 모든 사역의 첫 출발점임을 가르쳐 주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 요한복음의 때에 관한 말씀 -2:4, 7:30, 8:20, 12:23, 12:27, 16:32, 17:1 참조.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