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내가 사흘만에-

말씀: 요 2:12-25 요절: 요 2:19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3년 반의 공생애 사역을 보내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요한 복음에 나오는 네 번의 유월절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2:13이 첫 번째 유월절이며, 5:1에 두 번째 유월절이 나옵니다. 세 번째 유월절은 6:4에 나옵니다. 11:55에 네 번째 유월절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4 번째 맞으신 유월절에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고전5:7).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신 주님은 곧 바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이 일 후에 그분께서 자기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12). 주님은 가나 혼인 잔치가 끝나고 모친 마리아와 육신의 형제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모친 마리아는 하나님의 계시와 조명을 받는 택함 받은 이스라엘을 예표하고, 육신의 형제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반면 제자들은 보고 나서야 믿음을 갖는 사람들을 예표 합니다. 우리는 11절에서 제자들이 ‘보고 믿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동쪽 해안의 도시이름이며, 나훔의 마을이란 뜻입니다. 마태복음 4:13에 보면[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경계의 해안에 있는 가버나움에 와서 거하시니](마4:13)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곳에서 믿음 좋은 이방인 백부장을 만나셨고, 회당에서 많은 것을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눅4:31).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본거지였으나 이곳은 회개치 않음으로 주님께서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임을 받았으나 지옥에까지 떨어지리로다. 이는 네 안에서 행한 능력 있는 일들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도시가 이 날까지 남아 있었을 것임이라.](마11:23). 주님의 말씀대로 가버나움은 완전히 소돔처럼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나 도시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다 마찬가지로 흥망성쇠는 주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제국의 수도 바빌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천년 제국의 상징 로마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도시로 명명되는 예루살렘은 어떻습니까? 현재 전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불리는 뉴욕은 얼마나 가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은 전체가 탄탄한 도시로 건설되었도다.](시122:3)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20회 이상 무력에 의해 주인이 바뀌었고, 10회나 완전히 파괴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현재는 분할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주님을 거부할 때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도시는 곧바른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높임을 받으며 사악한 자의 입으로 인하여 무너지느니라.](잠11:11).[지혜가 지혜로운 자를 도시 안에 있는 열 명의 용사보다 더 강하게 하나니](전7:19). 우리가 나라를 세우고, 도시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는 길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족 사랑, 나라 사랑은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의 유월절(逾越節)이 가까우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사](13). 주님이 맞으신 공생애 사역에서 맞으신 첫 번째 유월절입니다. 이미 맨 처음에 말씀 드린 대로 요한복음에는 4번의 유월절이 등장합니다. 이는 주님의 사역이 3년 반 동안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도록 명령하신 세 명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출애굽기 23:14,17절에 [너는 한 해에 세 번 나를 위하여 명절을 지킬지니라](출23:14),[네 모든 남자는 한 해에 세 번 {주} [하나님] 앞에 나올지니라](출23:17)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준수하셨습니다. 이는 신약이 발효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의 명절은 이렇습니다. [네 모든 남자는 한 해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장막절에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분 앞에 보이되 [주] 앞에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신16:16). 무교절의 첫 날이 유월절이고, 칠칠절은 오순절의 다른 이름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우리는 이런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주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단 종파들에서는 아직도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어림없는 주장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은혜 아래서 율법 아래로 돌아가는 꼴이 되고 맙니다.[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아시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하노라.](갈4:9~11). 이는 바울 사도가 엄히 책망한 일이었습니다.[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과 구약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올바르게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경대로 한다면서 가장 비 성경적인 교리를 실행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해서 모두 우리에게 그래도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주의 유월절’(출12:11)이라고 불려 마땅한데 어느덧 타락하여 ‘유대인들의 유월절’(요2:13)로 바뀌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먹고 즐기는 명절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가셨을 때 성전에서는 예배 드리는 성도들을 보신 것이 아니라 장사꾼들을 보셨습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가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시니](14-16). 분노로 가득 차신 주님의 모습을 한번 그려 보십시오. 온유한 음성으로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사람들과 악수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는 과격한 행동이 행여나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계산을 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형사 입건이 될 만큼 노하셨고, 실제로 민사상 피해를 입혔으며, 폭언에 가까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전에 올라 오는 남자들은 성전 세금을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30:13-16보겠습니다. [계수된 자들 가운데 속하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에 따라 반 세겔을 바칠지니 (일 세겔은 이십게라라) 이 반 세겔은 주의 헌물이 될지니 계수된 자들 가운데 속하는 자 곧 스무 살이 넘는 자는 주께 헌물을 드릴지니라. 너희 혼의 속죄를 위하여 주께 헌물을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세겔보다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죄 돈을 취하여 그 돈을 회중의 성막에서 섬기는 일에 쓰도록 지정할 지니 이것이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념이 되어 너희 혼을 속죄하라](출30:13-16). 이것이 전례가 되어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이면 성전 세를 반 세겔씩 내야 했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공세(貢稅)라 불렀습니다. 덕분에 성전에는 환전상들이 있었습니다. 멀리 타 지역에서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We buy $5. We sell $7.’ 이런 식입니다. 환전 수수료를 물려서 이득을 취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장사를 허락해 주는 대가로 자리 세를 받았는데 이 수입이 엄청났음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희생물을 드려야 하는데 양, 염소, 소, 비둘기 등을 가지고 왔습니다. 흠 없는 것들을 재물로 드려야 했으므로 제사장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흠을 잡아내어 다시 가져오라고 하면 성전에서 파는 소나 양, 비둘기를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장사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부정과 비리가 먹이사슬처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은 희생(sacrifice)을 드리는 곳입니다. 장사하는 집은 이득(gain)을 남기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곳이 이득을 취하는 곳이 되었으니 이는 오늘날 기독교를 이용해 장사하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성경을 팔아서 이득을 취하고, 책을 만들어서 이득을 취하고, 신학교를 만들어서 이득을 취하고, 교회를 짓고 기도원을 지어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16절에서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16b). 주님은 호통을 치셨습니다. 주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우리는 다른 복음서에서 이와 비슷한 기사를 볼 수 있는데 이번에는 첫 번째 유월절이 아닌 주님이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에 맞은 마지막 유월절의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다 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탁자와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뒤집어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마21:12-13). 2년 뒤에 다시 오셨을 때도 성전의 타락한 관습은 그대로였습니다. 오히려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처음에는 ‘장사하는 집’이라 부르셨지만 2년 후에는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셨습니다.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 점점 정도가 심해집니다. 주님의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 장사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로 변하듯이,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굳게 하는 자는 갑자기 멸망을 당하되 구할 길이 없으리라.](잠29:1). 결국 이들이 장사하며 이득을 취하던 장사하던 집, 강도의 소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완전히 불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다가 이번에는 “내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그들을 내가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니 곧 그들이 내 제단 위에 드리는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내가/ 받을 것이라. 이는 내 집이 모든 백성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사56:7). 이는 주님께서 구약을 인용하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이 곧 자신의 집이며,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성전 청소(정화)에 대한 주님의 기사는 사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의 기사와 나머지 세 복음서의 기사는 시기적으로 3년의 차이가 있는 엄연히 다른 사건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를 간과한 채 동일한 사건으로 설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17절입니다.[그분의 제자들이 성경에 기록된바, 주의 집에 대한 열심히 나를 삼켰나 이다, 한 것을 기억하더라.](17). 제자들은 주님의 갑작스런 행동에 많이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때 성경 말씀을 기억했다는 것은 놀랍고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성경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69:9에 있는 말씀입니다.[내가 내 형제들에게는 낯선 자가 되고 내 어머니의 자녀들에게는 외인이 되었사오니 이는 주의 집에 대한 열심(熱心)이 나를 삼키고 주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를 덮쳤음이니이다.](시69:8-9). 제자들이 이 상황에서 이 구절을 떠 올렸다는 것은 이들이 메시야가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왜냐하면 시편 69편은 메시야에 시편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란 사실을 확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바른 믿음이요,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18절입니다.[이에 유대인들이 응답하여 예수님께 이르되, 네가 이런 일들을 행하니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이겠느냐? 하매](18). 유대인들은 즉각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에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유구무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의롭거나 선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책망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내 아버지 집”이라고 선언할 때 주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로 선포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란 증거를 보여 달란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무슨 표적을 보여 주겠느냐? 그런 말입니다. 예수님은 매사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직, 간접적으로 선포하셨고, 유대인들은 못 알아 들은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알아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표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합니다.[이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고전1:22). 여기서 ‘요구하다’ 란 단어는 require입니다. 법률 용어로써 강제적 의무, 구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으로 시작한 민족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표적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19절입니다.[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19). 주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표적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기로 한 표적은 바로 ‘요나의 표적’이었습니다. “내가 사흘 만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는 말씀은 죽음과 부활을 보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속적으로 보여 주시고자 하는 표적은 부활의 표적이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표적을 원할 때면 어김없이 부활의 표적을 보여 주실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에서 어떤 자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선생님으로부터 표적을 보기 원하나이다,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라.](마12:38-39). 이런 예는 또 한 번 나옵니다. [1바리새인들도 사두개인들과 함께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하니 3또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낮게 깔렸으니 오늘은 날씨가 궂으리라, 하나니, 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가 능히 하늘의 생긴 모습은 분별하거니와 시대의 표적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마16:1,3-4). 주님께서는 언제나 요나의 표적, 즉 죽음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부활을 표적으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그들의 반응은 주님의 말씀하는 의미와 전혀 다르게 나가고 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거늘 네가 그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느냐? 하더라.](20).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헤롯이 46년에 걸쳐 지은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며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자 유대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는데 6일로 족하셨다면 성전을 삼일 동안에 못 지을리도 없었겠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성전은 자신의 몸 된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전이란 주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뜬 구름 잡는 추상적인 말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는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성전의 의미가 자신의 몸을 가리키셨음을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는 증인들이 있습니다.[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14:58). 사람들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구약 성경의 증언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을 하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보옵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품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집이오리이까?](왕상8:27)라고 선언했으며, 이사야 역시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왕좌요, 땅은 나의 발받침이라. 너희가 나를 위하여 지을 집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에 있느냐?](사66:1)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성전이 진정한 성전이 아님을 유대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스데반이 유대인들을 향해 설교할 때,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께서는 손으로 만든 전(殿)들에 거하지 아니하시니 /이것은/ 곧 대언자가 말하는바,](행7:48)라고 선포했고, 사도 바울 역시[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殿)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행17:24)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전인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 주님의 몸은 하나님의 모든 신격이 거하는 진정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기 때문이라.](골2:9). 주님 안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는 그분 안에 모든 충만이 거하는 것을 기뻐하시고](골1:19). 주님 안에는 생명이 있고, 주님 안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지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3). 주님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지으신 성전 안에 거하지 않습니다. 제자들 역시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으며,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3년 후에 유월절 예비일에 죽으시고 주의 첫날에 부활할 것임을 정확하게 예언하신 것입니다. 3년 뒤 자신에게 닥칠 일을 예언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성경은 예언의 책입니다. 그 예언의 정확성으로 인해 우리는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신 뒤에야 비로소 그분의 제자들이 이것을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 기록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 제자들은 주님이 자신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의 문자적인 성취를 통해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정확한 성취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성경기록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부활의 표적이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반면 제자들 외에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 또 한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르되, 각하, 저 속이는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기를, 내가 사흘 뒤에 다시 일어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마27:63). 그러나 이들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정확히 주님의 말씀 즉 삼일 뒤에 일어나리라 하는 부활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자들도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때 이들은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배척했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마음에 받아 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23절입니다.[이제 유월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매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으나](23). 유월절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보고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보고 믿기를 원했고, 그들의 믿음은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후 5:7)고 했습니다. 실로 주님의 제자 도마조차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했으니 이는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습성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요20:29). 복된 성도들은 보지 않고 믿으며, 보지 않았으나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이렇게 칭찬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보지 못하나 그분을 믿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니](벧전1:8).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유대인들의 보고 믿는 믿음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24-25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으니 이는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더라.](24-25). 주님은 표적을 보고 믿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의지하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셨을 뿐 어느 누구에게 자신을 의탁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아십니다. 이는 우리 주님이 전지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십니다. 이는 주님이 속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 사악한 자의 사악함을 끝내시고 오직 의로운 자를 굳게 세우소서. 이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마음과 속 중심을 시험하시기 때문이니이다.』(시7:9). 예레미야 는 말하기를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고 각 사람의 길과 각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각 사람에게 베푸느니라.』(렘17:10)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속을 다 아시며, 우리의 생각하는 바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완전한 마음과 자원하는 생각으로 그분을 섬길지어다. 이는 [주]께서 마음을 다 살피시고 생각으로 상상하는 바를 다 아시기 때문이니 네가 만일 그분을 찾으면 만날 것이로되 네가 만일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28:9)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깨끗하여도 [주]는 영(靈)들을 깊이 살피시느니라.』(잠16:2). 『사람의 길이 자기 눈에는 모두 옳게 보여도 [주]는 마음을 살피시느니라.』(잠21:2).

● 주님께서는 사람이 모두 거짓말쟁이란 사실을 아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 /이것은/ 기록된바, 이로써 주께서 주의 말씀하신 것에서 의롭게 되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시리이다, 함과 같으니라.](롬3:4).

● 주님은 사람이 단지 풀과 같음을 아십니다.[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기 때문이라.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1:24).

● 주님은 사람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수증기임을 아십니다.[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약4:14).

● 주님은 사람의 마음이 항상 악할 뿐임을 아십니다.[[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 주님은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함을 아십니다.[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

이런 이유로 주님은 사람을 전혀 신뢰하지 않으시며, 자신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누구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주님으로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보증하시며, 성령께서 보증하시며, 성경이 증거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은 어느 위대한 선각자의 외침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은 어떤 사람의 지적인 통찰이나 관찰, 증언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증거했지만 그런 증거에 앞선 증거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람들의 말을 믿는 종교인들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사람들 누구에게도 증거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 이는 주님을 증거하는 완벽한, 완전한 증거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 대하여 증거하셨기 때문이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으며](요5:37).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무려 세 번이나 하늘에서 직접 음성을 발하시며 증거해 주셨습니다(마3:17, 마17:5, 요12:28).

둘째,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서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셋째, 성경입니다. [성경을 탐구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요5:39).

우리 역시 우리가 구원 받은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친구들이 ‘너는 구원받은 것 같애!’라고 말해 주기 때문입니까? 목사님이 인정해 줍니까?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증거, 성령의 증거를 받음으로 확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은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해 주십니다. 그 증거를 여러분은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증거를 얻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증거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