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말씀: 요 3:1-13 요절: 요 1:7,8

주님은 랍비요, 유대인들의 치리자인 니고데모의 방문을 받으시고, 거듭남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부흥사였던 죠지 휫필드는 평생 동안 ‘거듭남’에 대해 가장 많이 설교했는데, 누가 묻기를 ‘선생님은 왜 그렇게 ‘거듭남’에 대해서만 설교하십니까?’라고 하자,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거듭나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거듭남의 진리를 깊이 배우고, 거듭남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절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들의 치리자라.](1).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들의 치리자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된 자’란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침례인 요한과 주님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배척함으로써 위선의 누룩을 퍼뜨린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지만 좋은 면도 많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 오경을 완전히 암송했고, 일주일에 두번 금식을 했으며, 기도와 구제 등 종교적 의식에 특별한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빌3:5).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란 말은 바리새인들이 구약의 율법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잘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열심은 엄청난 것이어서 백성들은 다 그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들의 치명적 약점은 말만 하고 행동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하는 것은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대로 행하지는 말라. 이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아니하며](마23:3).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형식주의로 인해 여러 번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기원은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주도한 분리 운동입니다. 70년 동안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이방 여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들어온 경우가 많았고, 이교도의 풍습들을 그냥 그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분리를 주도했습니다. [포로로 사로잡혔다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그 땅의 이교도들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이스라엘에 속하여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다 먹고](스6:21). 느헤미야의 분리 운동은 얼마나 철저했던지 불순종하는 자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공동체에서 제외 시켜 버렸습니다. [누구든지 통치자들과 장로들의 권고대로 사흘 안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사로잡혀 갔던 자들의 회중에서 분리시키리라 하니라.](스10:8).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10:28절에는 이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그 나머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여러 땅의 백성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아들딸들과 지식과 명철이 있는 모든 자가](느10:28). 이들은 유대인들이 다시 우상 숭배에 빠져서 남의 민족의 포로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했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까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은 철저하게 유지되었습니다.

2절입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기적들을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니이다, 하매](2). 바리새인이요, 치리자였던 니고데모가 낮 시간 대신 밤에 주님을 찾아 왔다는 것은 은밀하게 비 공개적으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그렇게 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공인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찾아 오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는데,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는 니고데모 자신의 믿음이 아닙니다. “저는”이란 말 대신 “우리가”라고 했는데 이는 개인적인 신앙이 아니라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무리 신앙이 아니라 개인 신앙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견해가 아니라 “나의 견해”를 원하시며,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랍비여 우리는...”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바리새인 중에 주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으로 인정하고 아는 동조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반대했기에 자신들의 개인적인 신앙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머리로 알고 인정하는 신앙이 행동의 변화를 유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신앙만이 공개적인 신앙 고백과 더불어 삶의 변화를 유발합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우리가 아나이다...”란 신앙은 삶에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민과 갈등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그는 여느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행한 기적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가 믿은 믿음의 근거는 구약의 말씀이 아니며, 침례인 요한의 증거도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체험 신앙은 뜨겁다가도 주님이 기적을 멈추는 순간, 자신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행하지 않을 때 이들의 믿음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말씀을 통해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니고데모는 성전에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거룩한 분노에 깊은 감동과 충격을 받았고, 주님을 찾아 온 계기가 되었습니다.

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3). 주님은 니고데모의 말에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니고데모의 관심이 왕국에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의 치리자로서 로마의 압제하에 있던 당시 시대 상황의 어려움을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돌파해 보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정치적 조언을 구하러 왔거나 유대 왕국에 대해 놀라운 탁견이나 주님의 역할을 기대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정치적 왕국 대신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고,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니고데모의 고민에 대한 해답은 ‘거듭남’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고민으로, 여러 가지 봉착한 어려운 문제로 은밀히 주님을 찾아 왔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제시해 주시는데 인간의 모든 문제는 거듭남이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종교적, 율법의 한계는 “사람이 다시 태어남으로써” 간단히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멸시 받고, 짓밟히는 문제 역시 “사람이 다시 태어남으로써” 해결됩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불안 요소들, 가정의 어려움, 개개인의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3). 사람이 다시 태어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임하는 영적인 왕국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왕국이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다그쳐 묻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사람들이 이르기를, 보라, 여기 있다! 혹은, 보라 저기 있다! 하지도 못하리니 이는, 보라,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니라, 하시고](눅17:20-21).

사도 바울은 정의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喜樂)이기 때문이라.](롬14:17)고 했습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만 하면 영적인 왕국을 볼 수 있으며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사 모든 문제 해결의 첫 번째 비결은 ‘다시 태어남’에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답변에 당황했습니다. 그는 말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하매](4). 이는 니고데모의 지성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니고데모의 교육 수준이 낮아서도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요, 율법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주님과 대화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자연인들은 결코 영적인 진리들을 깨닫지 못하며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깨닫는 자에게는 이것들이 명백한 것이요, 지식을 얻는 자들에게는 올바른 것이로다.](잠8:9), [비웃는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지식은 깨닫는 자에게 쉬운 것이니라.](잠14:6) 했지만 니고데모는 이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깨닫는 것은 결코 학문과 교육, 지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히11:3).

니고데모는 왜 (why) 거듭나야 하는지를 묻지 않고, 어떻게(how) 태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왜 거듭나야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타락하고 더럽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쓸모없는 죄인이란 사실이 거듭나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고, 주님과 교제할 있는 영이 죽어 있다는 현실이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아무리 부자이고, 아무리 율법에 정통하며, 조상들의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까지 지켜가며 살아 간다 할지라도 그가 가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로 인해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모든 죄인들은 언제나 내가 왜 다시 태어나야 하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다시 태어난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다시 한번 답변해 주셨습니다. 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이 모태에 다시 들어가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전혀 이해 할 수 없었기에 주님은 매우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모태에서 열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주님은 몇 번 태어났느냐? 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탄생이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물에서 나고”란 말씀은 육체적 탄생을 말합니다. 이는 틀림없이 어머니 배 속 즉 양수 속에서 나오는 출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서 물을 침례라고 주장하거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문맥을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5절은 3절의 해설이며, 4절의 답변입니다. 물은 창세기1:20, 잠언 5:16, 솔로몬의 아가 4:12, 이사야 48:1을 보십시오. 한 구절만 봅니다. [내 누이, 내 정혼자는 둘러싸인 동산이요, 닫힌 옹달샘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2). 물에서 난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관용구처럼 사용되는 일상 용어였습니다. 니고데모는 물에서 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물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또 성령에게서 나고”란 말씀이 답변입니다.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면 그는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성령으로부터 태어날 수 있습니까? 태어나려면 낳으시는 분이 있어야 합니다. 낳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벧전1:3). 주님은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어떻게 우리를 낳으셨습니까?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생명의 씨입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없이 거듭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우리 편에서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됩니다. [그분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니라.](요1:13).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음이요,](갈4:26).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출생한 그 생명은 육신의 생명입니다. 다시 태어남이란 하나님의 생명으로 성령에게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서 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한 가지 소원은 하나님의 왕국을 보는 것이며,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왕국은 성전에서 희생물을 드리거나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나 어떤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거듭남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거듭나면 즉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며, 주님의 백성이 됩니다.

6절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6). 육신은 아무리 개조해도 육신일 뿐입니다. 이는 주님의 창조 법칙인데, 창세기 1장에서 거듭 반복되는 ‘그 종류대로’란 말씀대로입니다. 육에서는 결코 영적인 생명이 나올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개혁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개발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발전이나 혁명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다른 종류의 생명의 탄생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제 분명하게 전달되었습니다.‘/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결국 우리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란 말씀입니다. 인간은 육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요한일서 3:10에 이에 대한 분명한 구분이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주님께서도 자기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 점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수 없음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8:43-44a). 반면 영은 육에서 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은 영이신 하나님, 성령에게서 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은 영, 혼, 육의 삼위일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써 인간의 영은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고, 죽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이는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창2:17). 아담이 먹었을 때 그 날에 죽었던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또한 그분께서 범법(犯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라고 했는데 여기서 “죽었던 너희”란 영을 말합니다. [또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고](골2:13). 마찬가지로 죄들로 죽었던 것은 영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제자를 부르시면서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 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8:22). 이 말씀은 영이 죽은 자들로 하여금 육신이 죽은 자들을 장사 지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말씀 더 보겠습니다. [향락에 빠져 사는 여자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니라.](딤전5:6). 역시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것은 육신이요, 죽은 것은 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영이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은 어떤 시급한 문제보다 더 중대한 문제입니다.

성격을 개조함으로써, 종교적 체험을 함으로써, 어떤 계기를 통해서 돌변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육신은 아름다워도 육신이며, 더러워도 육신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좋고 나쁘고의 구별 없이 그 종류가 육신입니다. 반면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입니다.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에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니고데모가 되물었던 육신의 다시 태어남에 대한 주님의 설명은 너무나 명쾌하여 오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7절입니다. [내가 네게,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말한 것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7). 이 구절은 킹제임스 성경의 우수성을 알려 주는 구절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역본에서는 ‘ You’라고 하여 단 복수 표시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은 ‘thee’, ‘ye’로 단 복수를 구분함으로써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며 “너희(복수)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전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거듭남’에 대한 진리는 결코 어려운 진리가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다 종교적이 되고, 보다 도덕적이 되고, 보다 더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생명의 변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있어야만 합니다. 어린 아이가 출생할 때, 그는 과거가 없습니다. 오직 미래만이 있스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우리의 과거는 없습니다. 그 순간부터 오직 미래만 존재할 뿐입니다. 주님은 거듭나기 전의 우리가 행한 모든 것들을 다 제거하셨고,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육체적 출생은 우리를 아담의 후손으로 만들어 줄 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불순종의 자녀요, 죄악과 진노의 자녀 밖에 될 수 없습니다.

8절입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8). 헬라어나 히브리어로 바람과 영은 같은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숨)과 영은 같은 단어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시고 전능자의 호흡이 내게 생명을 주었느니라.](욥33:40). 여기서 하나님의 영과 전능자의 호흡은 동격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호흡이 바로 영입니다. 아담의 코에 호흡을 불어 넣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바람이 부는 것과 성령에게서 난 사람의 특징이 같습니다. 바람과 성령은 둘 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재하며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람은 그 자체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무엇인가를 움직이거나 활동하게 함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실체를 나타냅니다. 자연 세계에서 바람이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과 영적 세계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 매우 비슷합니다.

이는 거듭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육신, 외모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 즉 영 안에서 일어난 생명의 탄생이기 때문에 밖에서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시 태어났다고 해서 피부색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니며, 얼굴에 광채가 나는 등의 변화는 없습니다. 마치 바람이 마음대로 불어서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압니다. 하나님도 압니다. 마귀도 압니다. 성령에게서 난 사람은 곧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며, 성령의 증거를 얻게 됩니다.

성령님에게서 난 사람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 보겠습니다. 내가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몇 가지 "탄생표시들"이 있습니다.

●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성령님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이것이 첫 번째 증거입니다.

●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7).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찾듯이 신실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여 그 젖으로 자라갑니다(벧전2:2).

●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요, 죄를 지을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이라.](요일3:9).

●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자신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요일5:10; 롬8:16).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분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주신 증거를 그가 믿지 아니함이라.](요일5:10).

●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그분 안에 거합니다(요일3:24).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는 그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힘입어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형제를 사랑합니다(요일3:14).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줄을 알거니와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안에 거하느니라.](요일3:14).

●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요일5:4).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성령님에 의해 인도함을 받습니다(롬8: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롬8:14).

●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사람은 자신을 지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니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자기 자신을 지키매 저 사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스스로 자신을 죄에 내어 주는 자는 결코 거듭난 사람의 증거가 아닙니다.

9절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 하매](9). 주님의 자세한 설명과 답변에도 니고데모는 도무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한번 “어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 되물었습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는 어두운 밤만큼이나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모든 진리가 “있을 수 없는 일”로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그를 지배했습니다. 마귀는 누구의 마음을 가립니까?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神)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고후4:4). 믿지 않을 때 진리 마귀는 그들의 마음을 가립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어떻게 이런 일이…?”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말씀을 들어도 잘 깨닫지 못하는가?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마음이 완악하고 굳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며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바울 사도는 서신서마다 간절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골1:9-10).

셋째,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의 모임에 자주 빠지기 때문입니다. 지역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 지식을 공급해 주는 보급 창고요, 저장 기지입니다. 다윗은 시편 73:17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넷째,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해 줍니다. 성경은 혼을 개심시키며 노인들보다 지혜롭게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습니다(딤후3:16).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영감이 사람들에게 명철을 주시나니](욥32:8).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니고데모처럼 깨닫는데 우둔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1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일들을 알지 못하느냐?](10). 주님은 니괴데모를 책망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를 주님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 영적 생명의 탄생에 대해서 충분히 알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는 거듭남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앞으로 태어날 한 백성에게 그분의 의를 밝히 드러내며 그분께서 이것을 행하셨다 하리로다.](시22:31). 앞으로 태어날 한 백성이란 즉 육체적 출생이 아니라 영적 출생을 통한 한 백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올 세대 곧 태어날 자녀들에게 그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 그들이 일어나서 자기 자녀들에게 그것들을 밝히 알게 하리라.](시78:6). 주님은 메시야의 수난 시편을 통해서 ‘태어날 자녀들”, “태어날 한 백성” 등 영적 출생에 대해 기록해 두셨는데, 이스라엘의 율법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그런 구절들에 대해서 도무지 알지 못했으며, 가르쳐 주는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11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도다.].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늘 모세를 믿는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모세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해도 불신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라고 말한 것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을 말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하셔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끊임없이 증거하셨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증거하시고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조명해 주시고, 죄와 의와 세상에 대해서 책망하시며 인도해 주심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증거를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같은 사람의 증거는 잘 받지만, 심지어 떠도는 헛 소문, 남의 이야기도 잘 믿으면서 유독 확실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증거만은 잘 믿지 못합니다.

니고데모를 향한 주님의 가르침은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