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독생자를 주셨으니-

말씀: 요 3:11-21 요절: 요 3: 16

지난 시간에 이어서 니고데모를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듭남의 진리에 대해서 니고데모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자 주님은 니고데모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음에도 말씀을 깨닫는 지각의 영이 없었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보라, 네가 유대인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율법에 안주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훨씬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며 너 스스로 눈먼 자들의 안내자요,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틀을 갖춘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의 스승이요, 아기들의 교사라고 확신하는도다.](롬2:17~20). 그러나 이들의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이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7).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 현실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 지도급 위치에 있다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다녔지만 성경에 대한 무지는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도다.](11). 주님은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면서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한 것입니다. 이런 예는 창세기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形像)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창1:26).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混雜)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창11:7). 주님께서 우리라는 표현을 쓴 신약적인 예는 이렇습니다. [그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주님은 아버지를 포함해서 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요14:21).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성령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를 비롯한 당대의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서기관들, 유대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어서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함으로써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 지독한 불신입니다.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았습니다. 땅의 일들이란 육체적 출생을 언급하신 것이며, 바람의 부는 원리 등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은 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땅의 일입니다. 반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일은 하늘의 일입니다. 믿고 구원 받는 일, 새로 태어남에 대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경건의 신비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신비를 믿지 못해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고 했습니다. 이들은 땅의 일도 하늘의 일도 믿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땅의 일들과 하늘의 일들에 대한 분별을 전혀 못한 채 모든 구절을 영적으로만 해석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자적으로 읽고 믿어야 할 구절은 영적, 은유적,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영적으로 적용해야 할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믿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어찌 니고데모뿐이겠습니까?

13절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13). 이 구절은 주님의 무소부재를 드러내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영어 킹 제임스 성경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현재 완료형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 상태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니고데모와 마주 보고 대화하시는 주님께서는 현재 동시에 하늘에 올라가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란 말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 뒷부분은 과거형이 아닙니다. 동시에 현재 하늘에 계십니다(is). 땅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던 니고데모가 과거, 현재, 현재 완료 시제로 막 바뀌는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배교한 성서학자들은 이 구절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지라 ‘하늘에 있는’이란 어구를 삭제 해 버렸습니다. 믿을 수 없는 구절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은 잘못된 구절이라고 믿는 것이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잠언 30장에는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셨다가 내려오신 이가 누구시냐? 바람을 자기 주먹 안에 모으신 이가 누구시냐? 물을 옷에 싸신 이가 누구시냐? 땅의 모든 끝을 굳게 세우신 이가 누구시냐?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며 그분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네가 말할 수 있느냐?](잠30:4). 그리고 나서 그에 대한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지니 이는 그분께서 너를 책망하실 터인즉 네가 거짓말쟁이로 드러날까 염려함이라.](잠30:5~6). 순수한 주의 말씀을 신뢰할 때 답을 얻습니다.

이 진리는 현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만 동시에 하늘에도 있습니다.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복(福)입니다. 만약 이곳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2000년 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고, 함께 일으킴을 받아서 현재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아멘! 할 수 있습니까? [또 함께 일으켜 세우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의 처소들에 앉히셨으니](엡2:6).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3:3). 이런 진리가 바로 하늘의 일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있는 그곳에 우리가 있는 것은 당연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믿지 못하는 성경 교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에 당황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하늘에 올라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들림을 받았지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올라갔다는 말은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올라 간 것을 말합니다. 주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 간 사람이 없습니다.

14절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14). 이 사건은 유대인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사건입니다. 민수기 21:4-9에 나오는 놋 뱀 사건을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시켜 주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적 사건은 예언적 사건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놋 뱀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는 사건을 예표합니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에돔 땅을 가로질러 가려 하다가 낙담하게 되었고, 모세를 대항하여 불평했는데 그때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셔서 많은 수가 죽었으며, 이에 모세가 "놋 뱀"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아 그것을 장대에 달았는데 누구든지 구리 뱀을 바라보는 자는 불 뱀의 독으로부터 치유 받게 된 이야기를 니고데모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불 뱀"은 마귀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리고 "놋 뱀"은 마귀의 일을 저지하고 멸하기 위해 십자가에 들림을 당한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나 어린 양의 모형이 아닌 놋 뱀을 달게 하셨을까요? 이는 우리 주님께서 범죄한 죄인들, 하나님 앞에 진노와 저주를 받아 죽어가는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시는 저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 받은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주님은 세상 죄를 모두 자신이 몸에 담당하셨기 때문에 저주의 형상인 뱀으로 상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주님께서는 장대에 매달린 놋 뱀처럼 우리를 위하여 죄와 저주가 되사 높이 달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본보기로서의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올려져서"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구리 뱀"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볼 수 있도록 "들어 올려졌으며"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바라볼 수 있도록 "들려 올려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후에 다시 한번 이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려지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신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키심이라](요12:32-33).

우리는 여기서 구원의 단순성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백성들은 맨 먼저 자신이 뱀에 물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뱀의 독은 혈관을 타고 치명적인 고통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몸 안에 이미 죄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의 쏘는 것, 죄의 형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치료 받을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치료 약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뱀에 물렸을 때, 그 "놋 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면 무지함으로 인해 멸망 당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수많은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깨끗하게 해 줄 치료약을 준비 해 두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바로 그 치료약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치료약도 그것을 쓰기 전에는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만일 "구리 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기를 거절하였다면, 그들은 죽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죄의 상태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들 속에서 죽을 것입니다.

뱀에 물린 한 이스라엘 사람이 "놋 뱀"을 바라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오! 나는 구리 조각에 대해 어떤 믿음도 가지지 않아요. 나는 파스찜질을 해보거나 집에 있는 약을 마셔보겠어요."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선행, 고행, 음악, 세속적인 오락, 그리고 종교적인 습관과 같이 양심의 고통을 순화시켜주는 인공의 치료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뱀에 물린 또 다른 이스라엘인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놋 뱀'이 어떻게 치료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 알기 전에는 그 '놋 뱀'과 아무런 상관도 아니할 것이오. 나는 어떻게 그것이 나를 치료하는지 그 철학을 알고 싶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뱀의 형상으로 된 놋 조각으로 물린 상처를 문지르거나, 놋 조각을 취하여 약간의 풀과 함께 달여서 먹을 수 있는 약을 만들라고 말씀하셨다면 나는 사물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단순히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는 것은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짓이오. 나는 그것을 보기 전에 죽을 거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그같은 속죄의 철학(이론)을 이해할 수 없소. 그래서 당신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까지는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뱀에 물린 한 이스라엘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나는 내 상태가 좀더 나아지는지 보기 위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겠소. 만일 내가 좀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그 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 보기 위해 그 '놋 뱀'을 쳐다보겠소."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내일은 영적인 상태가 좀더 나아지겠지'라는 바램 속에서 살고 있으며, 만일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종교에 한번 "의지"해 볼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뱀에 물린 또 다른 이스라엘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이웃과 비교해 보면서 "내 상처는 내 이웃의 것만큼 나쁘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그가 살아있는 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이웃과 비교해 보면서 "나는 그들만큼 나쁘지 않아. 만일 그들이 구원 받는다면 나도 그렇게 될걸."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그 상처를 바라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치료 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치유하는 것은 "놋 뱀"이 아니라 바로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았고, "바라보는 것"이 그들을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계획에 관한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우리는 구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우리의 이웃과 우리 자신과 교회와 장식물들과 제사장들로부터 떼어서 "갈보리의 십자가"에 고정시키고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이룩하신 일을 받아들입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놋 뱀" 이외에는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습니다. 그분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치료 약입니다. 어떤 다른 이 안에서도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행4:12). "놋 뱀"을 바라보기를 거절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었듯이,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기를 거절하는 모든 이들도 죽을 것입니다.

주님은 놋 뱀의 사건을 통해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곧 바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15).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요, 목적을 스스로 밝히신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다른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놋 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누구든지 다 나음을 입었던 것과 동일한 진리입니다. 여기서 선택 받은 사람이라든지, 예정된 사람이라든지 이런 신학적 해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는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 범위-누구든지//선택된 자, 예정된 자, 택함받은 자가 아니라 누구든지 이다.

● 대상- 그를(예수 그리스도) 행4:12

● 조건- 믿는 자는// 믿음이외의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받 을 수 없다.

● 결과-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음.

● 아직도 성령으로부터 태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은 단지 믿음으로 쳐다보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 받습니다.

1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주님은 다시 한번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흔히 많은 성도들이 이 구절은 말 구유간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사건에 적용하기를 좋아하는데 어림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란 말씀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는 말씀이지 아기 예수를 주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넓게 해석해서 그렇게 의미를 포괄할 수는 있지만 핵심적인 의미는 14절부터 계속되어온 주님께서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 지에 대한 자기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란 말씀입니다. 이는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도 세상을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마땅히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는 근거 구절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에게 단 한번도 세상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대해 주신 명령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롬12:2).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 세상의 친구가 되지 말라.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4:4).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 세상을 이기라. 세상은 우리를 미워한다. 세상은 우리와 원수 관계이며 전쟁 중이다. 믿음으로 이기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까? 여기서 동사의 시제를 주목해서 보십시오. 주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현재형)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과거형). 이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단 한 차례 있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갈보리에서 보이셨고, 확증하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사랑의 하나님을 말하려면 먼저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에 나타났습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17). 이는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림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재림의 목적은 정죄와 심판입니다. 예수를 통해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18절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18). 주님의 말씀 한 단어 한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을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미래형)가 아니라 받지 아니하거니와(현재형)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신앙 생활을 합니다.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구원은 먼 미래의 일이거나 죽은 후에나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셨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를 믿고 있지 않다면 장차 정죄를 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믿지 않는 자들에게 ‘지옥’의 형벌을 선고하셨습니다.

왜 정죄를 받았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정죄를 받았느니라](18b). 황금률을 지키지 않았거나 십계명을 준수하지 않았거나 교회 생활을 잘 하지 않아서 정죄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하지 않았거나 고해 성사를 하지 않아서 정죄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침례를 받지 않아서 정죄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정죄를 받은 유일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믿지 아니하므로’. 사람이 지옥에 가는 유일한 이유는 살인, 간음, 도둑질, 사기, 거짓말 같은 악행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요16:8-9).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에 대해서 꾸짖으십니다. 사람이 평생 동안 짓는 많은 죄가 있어도 혼을 지옥에 빠뜨리는 죄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19-20절입니다.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고 또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 행위를 책망 받을까 염려함이요,](19-20). 사람들은 왜 주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박쥐가 어둠을 좋아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죄인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하는데 이는 그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빛에 나오면 자신의 행위가 다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책망 받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낮에 일어나는 범죄보다 밤에 일어나는 범죄가 수십배는 많은 법입니다. 술집이나 춤을 추는 곳, 부정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은 예외 없이 밝은 조명대신 어두침침한 것은 그들의 행위가 빛보다는 어둠을 좋아한다는 증거입니다.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밀수선이 들어올 때 헬기나 해양 순시선에서 비추는 빛은 그들에게 치명적입니다. 몰래 훔치는 현장에 누군가 빛을 비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불 꺼! 란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이와 같이 죄인들은 세상에 들어온 참 빛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비추고, 자신들의 행위를 환히 드러내는 것을 너무 싫어합니다. 그래서 나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위들을 악하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라.](요7:7). 주님께서는 현 세상이 악한 세상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개선하고 고쳐서 살만한 곳을 건설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모두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미 악하다고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는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특히 교회에서 주님께서 정죄하신 세상, 악하다고 심판을 선포한 세상에 미련을 두고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기도하는 일은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을 미워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그런데 세상과 친구가 되고 동화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주장을 하는 교인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는 사회 활동가요, 정치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니이다.](요17:14). 세상에서 인정받고 칭찬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너희가 아느니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는 생명도 없고, 성령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기 때문에 종교인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에 세상은 정확하게 알아보고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21절입니다.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으로 나아오나니 이것은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21). 진리를 행하는 자는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어둠을 싫어하며,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살피시고 보시기를 원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기를 만약 성도가 진리를 행한다고 하면서 빛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 말하고 어둠 가운데서 걸으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거니와](요일1:6).

주님은 밤에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장문의 설교를 하신 후에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으로 나아오나니”라고 끝맺음을 하셨습니다. 어두운 밤만큼이나 영혼이 어두웠던 니고데모에게 빛으로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