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말씀: 요 3:22-36 요절: 요 3:30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마치신 후에 자기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영적 의미가 너무나 큽니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기사를 통해 배움을 얻지만 오늘 읽게 되는 이 기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를 다루는데 있어서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 줍니다. 오늘 기사는 주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하신 일 중에 사람들에게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일 가운데 하나이며, 알려지지 않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에논에서 물 침례를 주신 사건은 좀처럼 그 영적 의미를 논하지 않는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22절입니다. [이 일들 후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으로 가사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며 침례를 주시더라.](22).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신 후에 주님은 유대 땅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백성들에게 침례를 주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침례를 주신 것은 아니고 제자들이 주었는데 침례인 요한보다 더 많은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제자를 더 많이 삼고 침례도 더 많이 주신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침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그분의 제자들이 준 것이라.)](요4:1-2). 주님께서 친히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지만 친히 침례를 주신 일에 대해서는 조금 놀라운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증거하기를 자신 뒤에 오시는 이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불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나는 너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려고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있으시매 나는 그분의 신을 드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마3:11). [참으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리라.](막1:8). 그러나 지금 주님의 제자들이 주는 침례는 성령 침례도 불 침례도 아닙니다. 성령 침례는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에 믿는 성도들 위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증거대로라면 주님은 물로 침례를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침례도 아니고, 주님의 침례도 아닌 이상한 침례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침례인 요한이 준 물 침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첫째, 백성들의 회개를 위한 것입니다. 둘째,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나는 너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려고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있으시매 나는 그분의 신을 드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마3:11). 요한의 침례의 핵심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입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침례를 주고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매 온 유대 땅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들을 자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막1:4-5).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면서 요한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의 침례를 받았다고 해서 죄를 사함 받거나 죄가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제거됩니다. 침례는 죄 사함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for the remission of sins)]이란 말씀에서 for는 ‘위해서’란 목적의 용법이 아니고 ‘인하여’란 이유와 원인을 나타냅니다. 죄들의 사면을 위한 침례가 아니라 죄들의 사면을 위한 회개입니다. 침례는 회개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혼들에게 죄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요한의 침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분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려 함이라, 하니라.](요1:31). 요한은 백성들에게 침례를 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고,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을 다녀오신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이 침례를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들이 준 침례는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은 왜 침례를 주도록 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요한에게 물로 침례를 받으셨음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죄를 고백할 일도, 회개할 일도 없는 분이시지만 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받으셨습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는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기 때문이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더라.](마3:13-15). 주님은 의를 성취하기 위해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침례를 받으신 목적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요한을 통해 증거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선포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침례인 요한처럼 백성들에게 침례를 준 것 역시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선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아와서 재 침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제자들 역시 주님께 다시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침례인 요한에게 받은 침례는 무효라거나 다시 자신에게 나아와서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증거 사역을 제자들이 동일하게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요한은 이미 주님이 메시야임을 선포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죄들의 사면으로 인한 회개의 침례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역시 그렇게 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23절입니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이는 거기에 물들이 많기 때문이더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으니](23). 이제 백성들에게 침례를 주는 분은 요한과 예수님 이렇게 두 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와서 침례를 받았듯이 주님께 나아와서 제자들이 주는 침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란 요한의 증거를 받아들였음을 입증하는 사례입니다.

24절입니다. [이는 요한이 아직 감옥에 갇히지 아니하였음이더라.](24). 요한은 사역 중에 당시의 왕이었던 헤롯의 죄를 책망하다 감옥에 갇혔고, 후에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들었습니다(마11:2).

25절입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 중의 몇 사람과 유대인들 사이에 정결하게 하는 일에 대하여 논쟁이 벌어지매](25).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침례의 영적, 성경적 의미를 논쟁했는데 정확히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이런 식으로 물 침례를 준 적이 없는데다 율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침례의 모형은 홍해를 가로지른 출애굽 사건, 요단강을 건넌 사건이 전부입니다. 그들은 정결하게 하는 일은 정결례의 예식으로써 몸을 씻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침례를 정결례의 의식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구약에서 정결례는 이렇게 행해졌습니다. [오직 금, 은, 놋, 쇠, 주석, 납 등 불에 견딜 만한 것은 다 불을 통과하게 하라. 그리하면 정결하게 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히 구별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하게 할 것이며 불에 견디지 못할 것은 다 그 물을 통과하게 할 것이니라. 너희는 일곱째 날에 옷을 빨고 정결하게 된 뒤에 진영에 들어올지니라.](민31:22-24). 정결케 하는 불과 물이 사용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물은 피와 더불어 정결케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17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정결하게 하는바 그 불태운 암송아지의 재를 사람들이 취해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19그 정결한 자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그 부정한 자들에게 뿌리고 일곱째 날에는 자기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목욕할지니 그리하면 저녁때에 정결하게 되리라. 20그러나 부정한 사람이 자기를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주]의 성소를 더럽힌 것이니 그러므로 그 혼은 회중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가 거룩히 구분하는 물을 자기에게 뿌리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민19:17-20). 정결례에 사용된 율법에 적힌 이런 예로 인해 침례 역시 죄를 깨끗하게 하는 정결 의식으로 생각했고, 이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침례는 이런 의미가 아니라 죽음 즉 장사지냄과 연관되어 있고, 신앙 고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물 침례는 결코 죄를 제거해 주지 못합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침례에서 핵심은 회개이지 침례가 아니며, 우리가 받는 물 침례 역시 믿음의 고백이란 점에서 믿음이 핵심이지 침례가 핵심이 아닙니다. [이것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또한 우리를 구원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라.)](벧전3:21). 요한의 침례를 거부한 유대인들은 단순히 침례를 받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이며, 오늘날 성도들이 침례를 거부한다는 것은 믿음의 고백,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양심의 응답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는 구원을 선물로 받아 놓고 안 받은 듯이 침묵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구에겐가 귀한 선물을 주었는데, 받은 사람이 아무 대답이 없으면 어떻게 생각됩니까? 물어 보았는데도 말로나 행동으로 응답을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가증스러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믿는다고 하면서 침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이며, 불신입니다. 주님은 회개의 침례를 거부했던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에게서 침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하더라.](눅7:30).

26절입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나아와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르단 /강/ 건너편에 계시던 분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는 바로 그분께서 침례를 주매, 보소서, 사람들이 다 그분께로 가나이다, 하니](26).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오는 것보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고 요한에게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이들의 증거를 볼 때 사람들은 요한보다는 예수님께로 더 많이 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사역이 자연스럽게 주님에게로 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사역이 모두 예수님께로 넘어 가 버리는 것에 대해 초조감이나 영적 시기심이 작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우리 교회의 성도가 남의 교회 목사에게 가서 설교 들으러 가면 기분 좋아할 목사님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는 경쟁 관계나 수평 관계, 대등한 동역자 관계가 아니라 주종 관계란 점을 요한의 제자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침례인 요한이 스스로 고백했듯이 자신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란 증언을 그의 제자들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불만이 생기는가? 언제 시기심이 생기는가? 이는 올바른 관계성이 정립되지 못했을 때입니다. 형제간에 형제 우애란 관계성이 있으면 시기와 불만, 다툼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성이 파괴되거나 약화될 때 욕심이 생기고, 다툼, 시기심이 생깁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정상적인 관계성-권위와 존경, 사랑과 복종-이 정립되어 있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부자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주종 관계입니다. 이는 주권 신앙은 어떤 신앙보다 중요합니다. 주님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나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실 수 있고, 나의 몸과 영이 전적으로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어떤 불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주님을 마치 자기 동료나 친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는 것을 기뻐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때로 우리의 삶이 너무 주님 중심적인 신본주의 삶이어서 삶에 재미도 없고, 나의 자아 실현이나 꿈도 포기해야 하는 아픔이나 손해 의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철저한 신본주의, 성경 본위의 삶이 매우 무미건조하고, 행복과 기쁨, 평안이 없는 메마른 삶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헌신을 해 본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은 놀라운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런 삶을 살 것을 명령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이것이 참된 주권 신앙에 기초한 영적인 삶입니다. 바울 사도는 실제로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음을 이렇게 간증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내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나니](빌1:20). 우리 모두 단 한 순간이라도 이런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27절입니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매우 지혜로운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에서 주지 아니하시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 요한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먹고, 마시고, 걷고, 말하고, 잠자는 일은 다 주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누가 너를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하느냐? 네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그것을 받았을진대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주님은 영적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며,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나누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을 받은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1:17).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해 베푸시는 그 침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언했습니다.

28절입니다.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 한 것을 너희 자신이 증거하느니라.](28). 요한이 침례를 주면서 자기 자신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후에 사도 바울의 증거에서도 드러납니다. [바울이 이르되, 참으로 요한이 회개의 침례로 침례를 주며 백성에게 말하되 너희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믿어야 하리라 하였으니 이분은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하거늘](행19:4). 침례인 요한은 백성들 뿐만 아니라 자기 제자들까지도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증인의 자세입니다.

29절입니다. [신부를 얻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그 음성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나니 그런즉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의 친구로 규정했습니다. 구약 성도 가운데 하나님의 친구(벗)이라 불린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주는 우리의 하나님 곧 전에 이 땅의 거주민들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이 땅을 주의 벗 아브라함의 씨에게 영원히 주신 분이 아니니이까?](대하20:7). 주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씨야,](사41:8). 아브라함이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행할 일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행하려 하는 바를 아브라함에게 숨기리요?](창18:17)라며 자신이 행할 일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종에게는 알려 주시지 않으시지만 친구에게는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인이 하는 것을 종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오히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 이런 이유로 주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자손인 우리에게 친구라 부르십니다.

주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신 또 하나의 이유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이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말씀하시는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을 받았느니라.](약2:23). 주님은 친구의 자격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아브라함은 이런 점에서 독생자를 바침으로써 주님이 말씀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독생자를 바치라는 명령대신 친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웃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기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친구의 자격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 역시 주님의 친구입니다.

이 구절을 교리적으로 보자면 신랑의 친구는 결코 신부가 아닙니다. 반면 교회는 정결한 신부이며, 성도들은 모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신부는 교회이고, 요한과 같이 구약 성도들은 신랑의 친구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혼인 잔치의 예식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그 종들이 큰길로 나가서 나쁜 자든 선한 자든 다 만나는 대로 함께 모아 오니 결혼식에 손님들이 가득하니라.](마22:10). 여기서 손님들은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며 처녀는 수도 없이 많으나 나의 비둘기, 나의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는 오직 하나뿐이로구나. 그녀는 그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그녀를 낳은 여인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딸들이 그녀를 보고 축복하니 참으로 왕비들과 후궁들도 그녀를 칭찬하는구나.](아6:8~9). 여기에는 왕비, 후궁, 처녀들이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처녀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대환란 때 구원받은 환란 성도들이 됩니다. 왕후들과 후궁들에 대한 언급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성경적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혼인 잔치에 신랑, 신부, 신랑의 친구, 처녀들(신부의 친구들-시45:8-15 참조),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 왕후들, 후궁들 이렇게 일곱 부류가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숙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인물들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신부로 맞이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고,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았으며, 솔로몬의 아가에는 솔로몬이 이방 여인 술람미 여인을 아내로 맞아 사랑을 나눈 기사입니다. 침례인 요한은 자신이 결코 신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았고, 그 점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30절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이 말씀은 모든 신약 성도들이 마음 가운데 새겨 두어야 할 진리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랑의 친구가 신랑보다 더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자신이 결혼식장의 신랑 친구로서의 직분을 정확히 깨닫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앞 날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곧 이어서 감옥에 갇히고, 죽음에 이르며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질 것임을 말하는 동시에 주님의 사역은 온 유대를 뒤 흔들어 놓을 것이며, 역사를 바꾸어 놓을 것임을 말합니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율법의 시대는 자신으로 인해 마감되고, 갈보리 십자가를 통한 새로운 은혜의 세대가 등장할 것임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요한은 대언자로서 예언(대언)의 등불을 밝히 비추고 있는 중입니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하자면 우리의 영적 생활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통한 삶이 아니면 결단코 주님을 높이고 영광스럽게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30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흥하여야 합니다. 반대로 나의 육신은 반드시 쇠하여야만 합니다. 이는 단순히 겸손을 강조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육신의 잔재들을 십자가에 넘겨주지 않고 여전히 살아서 움직일 때 주님은 영광을 받지 못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령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 되시느니라.](롬8:10). 이렇게 우리 안에 계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 몸은 끝장이 나야 합니다. 육신의 자랑도, 탐욕도, 교만도, 자의적인 겸손도 모조리 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반드시 흥하게 되고, 우리는 반드시 쇠하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사도 바울의 이 선언이 침례인 요한의 선언과 완전히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살아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과 역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우리는 모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늘 자신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볼 때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며, 교회를 볼 때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이방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은밀한 것들이 이렇게 드러나게 되므로 그가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또 전하기를 진실로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 하리라.](고전14:25).

신앙생활에서 내가 강해지면 성령의 능력은 약해지고 소멸됩니다. 반대로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해지고, 말씀의 은혜가 풍성해지면 나는 약해지고,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 때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사람들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연약할 주님의 강하심을 맛보게 되고, 주님의 온전한 능력이 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 (고후4:10~12). 이것이 바로 주님이 흥하고 내가 쇠하는 삶의 본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겠으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란 말씀은 부활 신앙에 관련된 위대한 신앙 고배입니다. 주님의 능력, 생명, 지혜 등 주님의 모든 것이 우리 안에 흥하게 되기 위해서는 나의 육신은 십자가에 처리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날마다 죽으려면 날마다 부활해야 합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한번 밖에 죽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흥하셔야 하고, 우리는 반드시 쇠해야 하는데 이는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만 가능합니다.

31절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자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나니](31). 주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신데, 하늘에서 나신 분이란 뜻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 오셨음을 여러 차례 증거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요8:23). 요한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는 모두 동일한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저 멀리 우주 밖의 하늘에서부터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믿는 이는 극히 적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주님은 셋째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분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거하시되 그분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가 없도다.](32). 예수님은 모세나 다윗, 요한처럼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대언자가 아니라 하늘에서 몸소 보고, 들은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셨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늘의 일들을 다 아시면 다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다. 환상이나 영 안에서 한 번 보고 오신 경험담이 아니라 그곳이 주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그런 증거를 받아 들이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수족관에서 태어나서 수족관에서만 살아본 물고기들이 바다나 강에서 온 고기들과 어울리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 색목인(色目人). 조선에만 살던 사람들은 중국 사신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33절입니다. [그분의 증거를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께서 진실하심을 인(印)쳐서 확증하였느니라.](3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시고, 자신의 소유로 표시해 두시는데 이것을 성령의 인침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마다 도장을 꽉 찍어두십니다. 이것은 영적인 일이라 우리 육신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진리입니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항상 있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라.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리니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인(印)치셨음이니라.](요6:27). 주님은 자기 백성들, 자기 소유를 표시하시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산 귀한 소유물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생명으로 난 구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고후1:22).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를 구원하는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고 또한 그분을 믿은 뒤에 저 거룩하신 약속의 영으로 인치심을 받았나니](엡1:13).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성령의 인침,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 침례 등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해 온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이 특별한 기적같은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나타남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침이란 믿는 자를 주님께서 표시해 두셨다는 의미이며, 우리는 봉인했다는 의미입니다. 봉투 안에 내용물을 넣어서 봉인하듯이 주님은 믿는 자들 안에 성령을 부어 주셔서 봉인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속의 날까지, 몸이 죽는 날까지 성령의 인침으로 인해 결코 성령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능력이나 열매의 표출은 성령의 인침, 성령 침례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걷는다면 우리는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3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말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라.](34). 성령을 부음 받은 사람은 결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세상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속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언제나 그 사람의 입을 통해 제일 먼저 드러나는데 그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며, 하나님의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기름을 부으십니까? 구약의 대언자, 왕, 제사장에게 주님은 기름을 부으셔서 직무를 수행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모두 왕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하는 증인으로서 대언자의 직무를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증거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님께 성령님과 권능으로 기름을 부으시매 그분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하셨음이라.](행10:38)고 했는데, 기름 부으심은 사역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음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구원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짓밟힌 자를 자유하게 하며](눅4:18). 이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말씀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신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목적으로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세우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고후1:21).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딛3:6). D.L 무디나 찰스 피니나 R.A 토레이, 빌리 선데이, 웟치만 니 등은 모두 이런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대한 풍성한 간증을 했는데,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엄청난 복음 전도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세상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증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 안에 주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결코 은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증거이며, 증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하여야 하리라.](요일2:27).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아는데 과학적 증거나 세상 위인들의 학설이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말해 주었고, 다수가 믿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며, 경험이나 느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아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믿음은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고, 무너질 수 있고,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을 통해 아는 것이라면 그럴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얻은 지식은 이성과 사유, 관찰과 결과, 사람들의 증거를 통해 얻은 지식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계시와 조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막무가내식 믿음, 눈먼 믿음이라고 멸시할지 모르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지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런 일입니다.

35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으며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 요한이 전한 가장 정확한 복음입니다. 영생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 현재 이미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미래에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위에 진노가 머물러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불순종의 자녀들이요, 진노의 자녀들입니다.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채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엡2:3).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받음으로 자신의 출생을 바꾸지 않는 이상 진노의 자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노의 자녀들 위에 있는 진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남으로써만 해결됩니다. 이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출생의 문제요, 생명의 문제입니다. [아무도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 위에 임하기 때문이니](엡5:6).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방법은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 행위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고 거듭남으로써 새 생명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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