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우물-

말씀: 요 4:1-14 요절: 요 4:13,14

요한복음 3장에서 바리새인이요 관원인 니고데모와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4장에서는 사마리아의 한 여인과 생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이 둘은 너무나 극적인 대비를 이룹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원수지간과 다름없는 장벽이 있었고 적대 관계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창기와 다름없는 여인의 신분 관계 역시 극과 극의 대비가 됩니다. 관원과 평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동일하며, 생명은 한 가지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지역, 인종, 성별, 신분, 재력, 학력 등 어떤 차별적인 요소도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원수된 것들을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진리는 사람들이 만든 장벽에 전혀 장애를 느끼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는 배운 자 못 배운 자, 가진 자 못 가진 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갈릴리로 돌아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이 침례를 주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더욱 분명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제자를 더 많이 삼고 침례도 더 많이 주신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시고](1). 사람들의 특징은 누가 더 많이 주는가? 누가 더 큰가? 누가 더 위대한가? 등의 비교로 날을 지샙니다. 침례인 요한에게 침례 받는 것을 거절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침례를 요한보다 더 많이 준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다시 요한에게 몰려갔던 것처럼 예수님께 몰려 올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침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그분의 제자들이 준 것이라.)](2). 침례를 직접 준 것은 주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아무에게도 침례를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침례를 준 것이라고 해도 주님이 침례를 주신 것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주님은 지상에서 손수 누구에게 침례를 주신 적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침례를 거의 주지 않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침례 자체에 구원이나 죄 사함, 능력 등의 의미를 부여하거나 누구에게 침례를 받았는가?로 파벌을 만들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무지한 사람은 성지 순례에 갔다가 요단 강물을 병에 담아 와서 목사님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한 요청했습니다. 거기 물로 받아야 진정한 세례가 아니겠는가?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어떤 사람은 유명한 부흥사가 오면 세례를 달라고 합니다. 전에는 작은 교회 목사님에게 받았는데 영 느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침례도 아닌 세례를 받으면서 그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은 그 의식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데서 비롯된 잘못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침례를 받았는가? 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런 육신적인 생각과 판단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침례를 거의 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가운데 아무에게도 침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것은 아무도 내가 내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의 집안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침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요,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셨음이라. /이것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4-17).

전에 어떤 형제는 몇 일전부터 금식하며 준비해서 침례를 받았는데,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자기 안에 아무런 느낌이 없자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가? 낙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침례라는 의식을 통해 믿음이 전수되거나 죄 사함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 침례를 통해 성령이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침례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때에](3).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유대로 오셨고, 유대에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시고자 하시는데 갈릴리로 가는 중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셨습니다. 주님은 이곳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머무셨습니다.

4절입니다.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으므로](4). 주님께서 사마리아를 반드시 통과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동편으로 멀리 돌아서 갔습니다. 사마리아는 나쁜 이름의 대명사입니다. 사마리아는 정치적으로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앗시리아에 멸망당하면서 앗시리아는 이곳에 이주 정책을 실시했고, 사마리아는 이방인과 혼혈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 역시 이방 종교와 혼합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잡종, 사생아 정도로 여겼습니다. 특히 70년 바빌론 포로기가 끝나고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을 재건할 때 이들은 성전 재건 사업을 극도로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들을 민족의 배반자, 언약의 파괴자, 이방인들과 연합한 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500여년이 지났지만 이들은 더욱 멀어졌고, 교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과 얼마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지 이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돌을 들고 던지는 것이 당연시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주님께서 사마리아를 반드시 통과해서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란 말씀을 주님은 자신의 여정을 통해 몸소 실행해 나가시는 중이었습니다. 만약 주님마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으시고 보통 유대인들이 하는 식으로 요단 동편으로 우회해서 갔다면 사마리아는 주님에게마저 버림받은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한국 사람들에게 왜놈(일본인)이란 말보다 훨씬 심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비방할 때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요 마귀 들린 자라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하니](요8:48). 그러나 주님은 사마리아를 결코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갈릴리로 가셨듯이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를 명하실 때도 이 순서대로 하도록 했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후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스데반이 죽은 이후로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임했을 때 제자들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음에 동의하더라. 그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있어 사도들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지역으로 널리 흩어지니라.](행8:1). 그리고 빌립은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그때에 빌립이 사마리아시(市)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매](행8:5). 사도들은 사마리아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을 듣고 사도들을 파송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내매](행8:14). 두 사도들은 가서 안수를 했고 역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고 선포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며 사마리아 사람들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선포하니라.](행8:25). 이는 이들이 복음을 통해 얼마나 크게 변화했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지역색이 있을 수 없고, 인종의 문제, 언어의 문제, 피부색의 문제, 경제적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알게 모르게 이런 장벽들이 있다면 이는 예수님의 본을 따른 것이 아니며 복음의 진리를 쫓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입니다. 예전에 미국은 인디언들을 죽이고, 그들을 야만인 취급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는 줄로 알았습니다. 인디언들을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미국은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했고, 대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으므로](4)란 말씀은 우리가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어디든지 반드시 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이 가장 혐오하는 곳, 결코 가고 싶지 않는 그 곳이 여러분에게는 사마리아이겠지만 그곳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합니다.

5-6절입니다. [이에 수가라 하는 사마리아의 도시에 이르시니 이곳은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 가깝고 이제 거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님께서 여행에 지치셨으므로 우물 위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5-6). 사마라아의 수가라 하는 도시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역사적 유래가 있는 땅으로써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때는 저녁 여섯시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의 시각에 여섯 시간을 더하면 우리의 시각이 됩니다. 그러나요한복음은 로마 시각으로 현재 우리의 시각과 같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석을 보면 정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은 유대 시각이란 관점인데 이는 초대교회의 역본들 중에 정오라고 번역된 역본들과 교부들의 기록에 '정오'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치셨다는 것은 주님이 완벽한 인간이 되셨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칠 때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주님도 지치셨습니다. 지친다는 이유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중단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쉼이 필요하면 쉬십시오.. 주님이 우물 위에 그대로 앉으신 것은 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지쳐서 쉴 때에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여러분 앞에 보내 주시면 여러분은 계속 쉬지 말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아니면 그 사람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십시오. 주님은 지쳐서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지쳤다, 피고하다, 힘들다는 이유가 주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변명이나 핑계, 합리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지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처럼 연약함을 친히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피곤하셔서 배 위에서 주무시기도 하셨고, 맨발로 걸어 다니신 적도 있으시며,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리신 적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밀 이삭이라도 뜯어 먹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밤 이슬을 맞으며 기도하신 적도 있으십니다. 종일토록 말씀을 전하시고, 그들에게 빵을 주신 후에는 혼자 홀로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돌에 맞을 위험에 처하시기도 하셨고,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리려는 무리들을 가로 질러 가시기도 하셨습니다. 비방과 욕설, 험담은 기본적으로 듣는 것이었습니다. 화를 내시기도 하셨고, 싸우기도 하셨고, 슬픔으로 우시기도 하셨고, 고뇌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

7절입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길으러 오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실 물을 달라 하시니] 이 구절은 그동안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정오로 해석해 왔던 구절입니다. 로마 시각으로 저녁 6시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로마 시각을 채택합니다. 주님과의 역사적 만남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아무도 만나 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아무도 만나 주지 않는 때에도 만나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이 만나 주셨던 사람들이 주로 사람들과의 만남에 실패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건넸다는 점입니다. 죄인들이 주님과의 만남을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죄인들을 만나 주십니다. 언제나 주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문을 두드리시고,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마실 물을 달라” 주님은 단 두 번 목이 마르셔서 물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일 후에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일이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 기록을 성취하시려고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19:28). 주님은 십자가에서 목마름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 번다 물을 먹지 못하셨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모두 사람들에게 주시고 정작 자신은 목이 말라야 했던 것입니다.

8절입니다. [(이는 그분의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도시로 갔음이라.)](8). 이곳에는 사마리아 여자와 주님 단 둘입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한다 해도 먹을 것이 없으면 사러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 경제적 문제가 인류에게 최고의 지상 과제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차라리 굶어야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홀로 두고 먹을 것을 사러 갔습니다.

9절입니다. [그때에 사마리아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마실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相從)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9). 여자는 예수님이 마실 물을 달라고 한 것을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유대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 구주와 죄인이란 극과 극의 만남입니다.

사마리아와 유대인이 이렇게 상극이 된 이유는 역사적 기원이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약간 언급했지만 다시 살펴 보겠습니다. [그 뒤에 아시리아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 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곳을 삼 년 동안 에워쌌더라. 호세아의 제구년에 아시리아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아시리아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강가의 하볼과 메대 사람들의 도시들에 두었더라.](왕하17:5~6). 앗시리아 왕은 강제 이주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사마리아에는 이방인들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리아 왕이 바빌론과 구다와 아바와 하맛과 스발와임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자손 대신 사마리아의 도시들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소유하고 그 도시들에 거하니라. 그들이 거기에 처음으로 거할 때에 [주]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사자(獅子)들을 그들 가운데 보내시매 사자들이 그들 중에서 몇 사람을 죽이니라.] (왕하17:24~25).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방민족들에게 사자를 보내서 물어 죽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들은 사마리아에서 율법을 아는 자들을 데려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왕상17:27,28). 이 때부터 이들은 혼혈족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멀어진 정도가 아니라 원수 지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1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마실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10).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구구한 답변을 하는대신 구원의 본질로 곧 바로 들어가 핵심을 답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선물을 알면 다 구할 것입니다.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물을 아십니까?

● 성령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돈과 함께 네가 망할지어다.](행8:20). [할례에 속한 자들로서 믿는 자들 곧 베드로와 함께 온 자들이 이방인들 위에도 성령님을 선물로 부어 주시는 것으로 인하여 다 심히 놀라니](행10:45).

●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니라.](롬6:23).

●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이니라.](롬11:29).

● 넘치는 은혜(물질)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또 그들이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로 인하여 직접 너희를 위해 기도함으로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4-15). 재물을 통해 필요를 공급하고 돕는 일을 하는 것은 주님의 풍성한 선물입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뿌리라고 했지 재물 자체를 문제 삼은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재물을 얻을 때 그것이 주님이 주신 복이요, 능력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오직 너는 [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는 그분께서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니 이것은 그분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8:17~18). 먹고 마시며 자기의 일한 수고의 대가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기의 모든 수고로 인한 좋은 것을 누려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알았도다.](전3:13). [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부와 재물을 주사 그것을 먹고 자기의 소유를 취하며 자기의 수고한 것을 기뻐할 권능을 주셨나니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로다.](전5:19).

●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THAT)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여기서 ‘이것’(IT)은 구원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가 아니라 믿음(FAITH)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 분별 있는 아내는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들에게서 상속받거니와 분별 있는 아내는 [주]께로부터 오느니라.](잠19:14).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당연히 구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 하늘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들이 쌓여 있는데 성도들은 구할 생각도 하지 않음으로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약4:2).

죠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바르게 기도하는 것도 얼마동안 기도를 계속한다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끝까지 기도를 계속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대 부분의 경우 우리는 축복을 받을 때 까지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축복을 쉬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 또 네게 마실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10)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누구나 주님께 필요를 구했을 것입니다. 주님께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아무 것도 아닌 줄 알거나 주님이 누구신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않거나 해도 건성으로 하는 이유는 대부분 주님이 누구인 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불가능이 없으시며, 무한하신 하나님,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며,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신자들이 주님을 모르는 것은 불신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주님을 모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악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로 인해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탐욕이란 우상을 마음에 숨겨 둘 때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안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수차례에 걸쳐 “너희가 알았더라면...”하시며 무지와 불신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니](마12:7). 그들이 호세아 6:6에 나오는 이 말씀의 뜻을 알았더라면 주님을 정죄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알았더라면 아무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주님을 알았다면 아버지 하나님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에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가 나도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하시더라.](요8:19).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분을 알며 또 보았느니라.](요14:7).

다시 1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마실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요4:10). 예수님을 안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구했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알고 구했다면 “생수를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여자가 구했을 경우에 이미 주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란 말씀 그대로입니다.

‘생수’란 무엇입니까? 구약을 아는 사람이라면 생수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 주님이 생수의 샘입니다. [이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음이니 곧 그들이 생수의 샘인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물 저장고들을 판 것인데 그것들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니라.](렘2:13). 생수의 샘을 버리고 물 저장고를 파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이는 우물을 버리고 물병을 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 주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음이니이다.](렘17:13). 주님으로부터 생수가 흘러 나옵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나가되 그 반은 앞바다로 그 반은 뒷바다로 나갈 것이요,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14:8). 그 날이란 천년 왕국인데 예루살렘에 주님의 보좌가 놓여지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생수가 앞 바다로, 뒷 바다로 나가며 일년내내 계속 흘러 나옵니다. [또 그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왕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을 내게 보여 주니라.](계22:1).

● 성령이 생수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7:38). 생수는 믿기만 하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주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주님께 구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선생님께는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자녀들과 가축들이 다 마셨는데 선생님이 야곱보다 더 크시니이까?](11-12). 영적인 진리를 육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입니다. 이는 니고데모도 그러했고, 사마리아 여인도 그러했습니다. 여자는 자기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했던 유대인 남자가 갑자기 생수를 주었으리라고 말하는데 정신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니고데모가 영적 출생에 대해서 말하자 육신의 출생으로 대답한 것처럼 영적인 생수를 이야기하자 마실 물을 생각했습니다. 동문서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맨 먼저 생각한 것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맨 먼저 수단과 방법을 찾습니다. 어떻게? 란 질문이 제일 앞 자리에 옵니다. 구원은 누가?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어떻게 해야? 무엇을 해야? 보다 누가 구원을 주시는가?란 질문이 먼저 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가(who)에는 관심이 없고 언제나 방법(how)에 관심을 갖습니다.

여자의 또 한 가지 걱정은 “이 우물은 깊은데”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를 금방 만들어 내곤 합니다. 이 우물은 깊은데, 나는 돈이 없는데, 능력이 없는데, 친구가 없는데, 나이가 들었는데, 말을 못하는데 등등의 불가능한 이유를 줄줄이 쏟아냅니다. 필요한 것은 자신이 아는 어려운 이유들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침례인 요한의 아버지 천사 가브리엘이 수태 고지를 해 주자 “나와 내 아내는 늙었는데”(눅1:18)라며 하나님을 걱정했습니다.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라며 걱정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물 길을 그릇이 없다, 이 우물은 깊다는 등의 말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다 불신의 소산물입니다.

여자는 주님에게 “야곱보다 더 크시니이까?”란 질문을 했습니다. 야곱은 샘을 주었고, 그 샘은 무려 천년의 세월이 넘게 물을 내어 그 동네 사람들을 먹였는데 당신도 이런 우물을 하나 파 주실 수 있습니까?란 말입니다. 주님은 사람들로부터 자주 비교를 당했습니다. 침례인 요한과 비교 당하기도 했고, 아브라함과 비교 당하기도 했습니다. [네가 이미 죽은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크냐? 또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네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요8:53). 모세와 비교 당하기도 했습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는 보잘것 없는 위인들과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야곱이 땅에 우물을 파 주었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 영생하도록 솟아는 생명의 샘을 하나 넣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를 어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반격하는 불신자들의 놀라운 순발력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듣거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가 잘 못 알아 들었으니 다시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말로 주님을 반격했습니다. 이는 불신자들 안에 역사하는 마귀의 영이 주는 능력이요, 지헤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는 왜 만들었어?”,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지? 노아는 어떻게 방주에 모든 동물을 넣었지요? 어떻게 인종이 나누어졌지요? 하나님의 언약궤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교회는 왜 그렇게 종파가 많지요? 등등의 질문을 하면서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란 말씀에 대적합니다.

이 때 여러분이 조심해야 할 일은 그런 질문에 대답해 주는 대신 낚시 바늘에 걸린 고기를 잡아 당기기만 하면 됩니다. 퍼덕거린다고 같이 퍼덕 거려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여자를 낚아 올리셨습니다. 주님은 무식한 초보 전도자들처럼 [내가 야곱보다 크니라]와 같은 식으로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대답은 쓸모없는 대답입니다. 여자는 사실 그런 것을 알고 싶어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이 쏟아 놓는 질문은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는 질문이 거의 없습니다.

13-1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구든지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13-14). 주님은 이 땅의 물, 즉 야곱의 우물에 있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이 마르다고 하십니다. 물은 더우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마셔야 합니다. 땀을 흘리면 더 많이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는 한 번만 마시면 영원토록 갈증을 없애 주는 물이란 의미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을 이루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마르지 않는 샘,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이 있기 때문에 밖에서 들여 올 필요가 없습니다.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물을 구하러 어디론가 다녀야 합니다. 그러나 속에 샘이 있는 사람은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갈증이 없습니다. 강가에 심기운 나무보다 더 좋은 나무는 바로 자신 안에 샘이 있는 나무요, 푸른 물가로 인도함을 받은 양들보다 더 좋은 양은 그 속에 샘이 있는 양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안에 샘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주님은 우리 안에 샘을 주셨습니다.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은 사람은 더 이상 타는 갈증과 목마름이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 집에 수도가 없어서 매일 물을 길으러 물지게를 지고 하루에도 수차례 샘으로 갔습니다. 물은 아무리 퍼 날라도 부족했습니다. 어떤 날은 실수로 두레박을 빠뜨려서 물을 긷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마당에 물 펌프가 있어서 물을 한 바가지만 붓고 누르면 계속 물이 나오는 그런 집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집에 샘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온 동네에 수도 시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수도를 틀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자기 마당에서 물이 나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지 그 기분은 아마 고생해 보지 않는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자기 속에 생수의 샘이 있다는 것은 어디로 물을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함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곧 바로 마실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샘을 두고 밖에서 물을 찾는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안에 주님이 주신 우물을 막아 두고 밖에서 물을 찾고 있지는 않는지 보십시오. 주님이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지는 않는지, 믿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땅에서 나는 물은 어떤 물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목이 마릅니다. 그것이 성공의 단물이든 실패의 쓴물이든 부귀의 꿀물이든 정욕의 썩은 물이든 평범한 삶에서 오는 일상의 민물이든 경험에서 오는 지혜의 약수이든 알카리 이온수이든 간에 땅에서 나는 것은 다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만이 이 사실을 알며, 이 물을 맛보며 삽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물에 대해서 듣긴 했지만 마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영적 체험도 놀라운 경험도 없이 그냥 수박 겉핥기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물을 마시라고 지금도 초청하고 계십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다 이루어졌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의 샘에서 값없이 주리라.](계21:6).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하시더라.](계22:17). 이 얼마나 놀랍고 복된 초청입니까? 그냥 와서 마시면 됩니다. 모든 갈증이 일거에 해소됩니다. 그리고 다시 목마름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