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

말씀: 요 4:15-26 요절: 요 4:23-24

대낮에 우물가에서 시작된 생명의 샘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목마른 영혼들에게 진정한 생수가 무엇이며, 갈함이 없는 영원한 샘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위대한 진리의 선포였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목마름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둘째, 주님이 누구신 줄 알고 구하면 됩니다(4:10). 주님과 주님의 선물을 알고 구하는 것이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 모든 영적인 문제는 주님께 구할 때 해결됩니다.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발버둥치지 마십시오. 주님은 하나님의 선물과 주님이 누구신줄 알고 구했다면 주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면 주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란 말씀대로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주리고 목마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갈 것이요,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릴 것이며 그들의 큰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를 것이라.](사5:13).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누구나 다 주리고 목이 마르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목이 말랐던 문제와 배교한 이스라엘이 목이 말랐던 문제는 동일한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이 여전히 갈증의 문제로 시달린다면 역시 동일한 이유입니다.

갈증 해소를 내건 음료수들이 많이 있지만 진정한 목마름의 문제는 하나님의 선물과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주님께 구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갈증이 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말씀들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요,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교회가 그렇게나 많고, 서적들이 쏟아지고,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하지만 정작 갈증을 해결해 줄 그런 생명의 말씀은 희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氣盡)하리라.](암8:13). 고도 문명 사회에 사는 청년들이 죄악 가운데 빠지고, 히피가 되고, 마약에 빠지고, 방황하다 자살하는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오랜 기간 학교를 다니지만 어디서도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기갈이 들리고,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하고 있습니다. 많은 책과 공부, 종교와 철학, 스포츠, 영화, 여행 등 여유로운 문화생활을 한다고 해서 갈증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주님의 선물과 주님을 알고 그분께 구함으로 해결되며, 주의 말씀들을 들을 때 해결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가르치신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로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여인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여전히 육신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술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기적을 일으켜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고 나서 목사님에게 “당신이 아까 말한 것들을 내게 주시오”라고 했습니다. 준다는 것이 엄청 많은 것 같은데 자신이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은 ‘은혜를 많이 받았다’, ‘성령을 받았다’, ‘은사를 받았다’, ‘평안을 얻었다’고 간증을 하니 나에게도 그런 것들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교회를 가서 성도들끼리 나누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뭘 많이 받았다, 얻었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이 말씀하신 물이 지하 천연 암반수나 에비앙 생수나 북극에서 얼음을 녹인 무공해 자연수와 같은 좋은 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했거나 야곱의 우물보다 더 크고 깊은 좋은 우물을 하나 파 주시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성에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한 일입니다(고전2:14).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은’(9)이라고 불렀다가 ‘선생님이여’(15)라고 호칭을 바꾸어 부른 것은 대단한 발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영적인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여자는 물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 믿음은 없었지만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물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여기로 불러오라.](16). 주님은 대화 도중 여인의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여인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잘 아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여기로 불러오라’는 말은 잘못한 아이들에게 부모를 학교로 불러 오라는 말이나 범법한 사람들에게 경찰을 불러 오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드러내기 싫은 문제가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이 안고 가려는 것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짚어 내시고, 주님 앞으로 가져 나오라고 하십니다. 남편 문제 해결하고 주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선물, 즉 구원의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 여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죄 문제의 해결입니다. 회개없는 구원이 없고, 죄의 고백없는 용서는 없습니다. 주님은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 곧 바로 그녀의 죄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죄를 주님 앞에 들고 나와서 자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채 구원을 선포하는 구령자만큼 어리석은 구령자는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구령자는 죄인들에게 구체적인 죄를 지적하고 그 죄에 대해 고백하게 하고, 죄인임을 깊이 인정한 후에 주님을 부르게 합니다. 마치 의사들이 약을 주고, 수술을 하기 전에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물어보고, 눌러보고, 검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술은 먹는지, 담배는 피우는지, 마약을 하는지, 단 것을 좋아하는지, 매운 것을 좋아하는지 다 묻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술 드십니까? 담배는? 거짓말하십니까? 탈세 하십니까? 간음했습니까? 도둑질은요? 이렇게 구체적으로 물어 가면서 상대가 버럭 화를 내며 분통을 터뜨리더라도 그 죄를 주님 앞으로 가져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라면서 혼자 숨겨 놓고 먹는 것, 몰래 보는 잡지, 혼자만의 고민을 적은 일기장 등을 어머니나 아버지, 선생님이 “이리 가져 와 봐”할 때 미적미적 숨기면서 뒷 꽁무니를 빼면 “손이리 올려 놓고, 가방도 이리 올려 놓아라.” 했을 때 난감하고 당황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런 숨겨 놓은 죄들을 갖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조금 남겨 두어도 주님은 “어허...이게 전부냐?” 물으시면 우리는 또 내 놓고, 또 내 놓고 하다가 모든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주님께서 여인이 범한 죄에 대해 책망하시고, 분노하시며, 벌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편을 여기로 불러 오라고 하면 당황합니다. 결혼도 하지 않는 채 동거하는 여인들, 별거하고 있는 부부들, 남의 여자나 남자와 살고 있는 사람들, 형식적인 부부 관계는 유지하지만 이미 깨어진 것과 같은 가정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면 전 남편 말인가요? 지금 살고 있는 남편 말인가요? 라며 되물을만한 사람들이 교회 내에 허다합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남편을 여기로 불러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는 주님 앞에 들고 나가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한 말이 옳도다.](17). 여자는 즉시 주님의 요구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도 누구와 살고 있지만 그녀는 남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이라고 부를만한, 내세울만한 그런 남편이 없다고 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남편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남편이라고 할만한 관계의 남자가 없었다는 말이 어울릴 것입니다. 아니면 모두 일시적으로 동거만 하며 살았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산 법적으로 남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서도 이 정도면 사회적, 도덕적 비난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당시 사회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말을 그대로 사실로, 진실로 받아 주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한 말이 옳도다.” 주님은 여인이 행한 모든 일들뿐만 아니라 마음의 의도와 생각까지 다 아십니다. 주님이 여인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18절입니다. [이는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 점에서 네 말이 참되도다.](18). 남편이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과거의 일이고, 현재 있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동거인이거나 기둥서방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이 없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법적으로 사실이란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편은 이 여자의 남편이 아니라 다른 여자의 남편일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과거의 죄를 고백한 것도 아니고, 현재의 죄를 제대로 회개한 것도 아니지만 주님은 모두 다 드러내 버리셨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너무 오래되어 생각에서 지워진 것 같은 사소한 죄까지 다 생각나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우리가 숨기려고 해도 자꾸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주님께서 그 죄를 지적하시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마리아 여자와 같이 다섯 남편과 함께 살며, 지금 살고 있는 있는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닌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업하며 돈 잘 벌던 Mr. 김(金), 악착 같이 벌기는 하지만 쓸 줄 모르는 Mr. 전(錢), 무엇이든지 아는 것 같았지만 별 볼일 없던 Mr. 지(知), 시험에는 떨어질 줄 모르는 글 잘 쓰던 Mr.문(文), 권세 좋던 Mr. 권(勸), 허랑 방탕 Mr.허(虛), 방송을 많이 타 유명세를 치르는 star, Mr. 연(演).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한 때 자기 꿈을 실현시켜 줄 남편으로 군림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진정한 남편이 아닙니다.

19절입니다.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보니 선생님은 대언자로소이다.](19). 여자는 주님의 말씀에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이 말은 한국식으로 하면 '참으로 용하십니다' 정도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은 대언자들을 영적 분별력을 갖춘 사람으로 알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훤히 알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자 틀림없이 대언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사람이 마땅히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여자는 주님을 대언자로 인정한 후에는 즉시 자신의 문제에서 다른 문제로 대화의 주제를 바꿔 버렸습니다. 껄끄러운 죄 문제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보다야 이왕 나온 김에 예배 장소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로 토론을 벌리고자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림신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이것을 모르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자는 말 머리를 돌린 것입니다. 마치 죄에 대해서 증거를 하면 ‘기독교는 교파가 많다면서요.’ 누가 그것을 모릅니까? 불신자나 신자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교회 목사들이 문제가 많다면서요.” 누가 그것을 모릅니까?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성경이 지적하는 자신의 죄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연막을 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이르리라.](21). 주님은 여자가 야곱보다 크냐? 는 등의 질문에서는 일체의 응답이 없으셨고, 완전히 무시해 버렸지만 예배에 관해 말을 하자 곧 바로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경배를 부탁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경배를 드리라고 제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십니다. 주님은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림신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23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22절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하고 우리는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22). 이 구절은 무지하면서도 경건한 체 하는 성경 학자들과 교사들에게 큰 논란거리를 일으켰는데, 주님께서 알지 못하는 것(what), 경배하는 것(what)이라고 사물화 시켰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분(who), 아는 분(who)이라고 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구절은 로마서 8:26절에서도 발견됩니다. 성령을 it으로 번역했다고 오역이라고 난리를 칩니다. 가끔 주님을 높여 드리고자 하는 경건한 학자들은 헬라어 본문을 고쳐가면서 성경을 번역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했는데 이는 이방인들이 ‘알지 못하는 신’[TO THE UNKNOWN GOD](행17:23)에게 경배한 것과 같습니다.

여자는 경배의 장소를 문제 삼아 이야기했지만 논점은 장소가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장소, 우리는 아는 장소가 아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 우리가 아는 것 즉 경배의 대상이 핵심이란 것입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구원자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구원자와 동일하게 사용된 예입니다. 구원자는 유대인 외에 어떤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니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원자가 나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시리니](롬11:26).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오시는데 이것은 주님의 약속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자를 일으키셨으니 곧 예수님이시](행13:23). 예수님은 유대인이시지 백인이나 흑인이 아니십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 대해 논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 그들에게는 양자(養子) 삼으심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주심과 하나님을 섬김과 약속들이 속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체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4~5). 주님께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하신 것은 여자가 맨 처음에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어찌하여...”(9)란 말씀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즉 구원자가 자신이란 말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23절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23).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는가? 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 의 문제는 더욱 중요합니다. 참된 경배는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드리는 경배입니다.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영과 진리로 할 때 영은 우리가 거듭난 영을 소유해야 함을 말합니다. 참된 경배는 거듭나지 않는 영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바른 성경, 하나님의 말씀없이 드리는 경배는 참된 경배가 아닙니다.

24절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24). 하나님은 한 영이십니다. 영이란 비인격적, 무감각의 어떤 힘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영입니다. 마귀도 영입니다. 하나님 역시 영이십니다. 영이란 것이 연기나 바람처럼 막연한 어떤 것,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것, 본질과 정신에 속한 것 등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은 철학적 사고이지 성경의 증거가 아닙니다. 영은 실체요, 인격적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must(반드시)란 말입니다. 영과 진리로 경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좋다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경배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는 것은 경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참된 경배의 회복입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아벨의 예물을 받으셨듯이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든지, 거절하시든지 분명한 응답이있기 마련입니다. 참된 예배는 영적 축복이 있습니다. 영적 축복은 예배의 부산물입니다. 성령 충만 역시 바른 예배를 드린 성도들에게 주신 주님의 응답입니다. 영혼 구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심과 혼들의 변화는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주어집니다. 헌신의 결단 역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그는 고향을 떠났는데 이는 이사야가 제단 가운데서 주님의 영광을 목격한 후 주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것과 흡사합니다. 만약 선교 사역이든 구제 사역, 어떤 사역이 예배와 분리될 때 인간의 욕구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능력이 아닌 사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영과 진리를 통해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의 모든 사역과 일이 주님의 인도하심가 능력 아래로 철저히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영적 열매와 능력의 결핍이란 고통을 겪는 이유는 참된 경배에 실패하기 때문에 오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모든 사역, 모든 삶, 모든 생각과 행동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경배와 분리될 때 아무런 열매도 능력도 얻지 못합니다.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왜 내게는 능력이 되지 못하는가? 간단합니다. 영과 진리로 경배하는 바른 경배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경배자,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경배가 아닌 위선과 형식과 외식적인 종교 행위로 예배 시간을 떼우고 말기 때문에 여러분이 드린 예배에 주님께서 아무 응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배 시간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며 성가대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세미나가 도입되고, 멀티미디어 예배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주님께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려지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때 주님은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라 삶의 능력이 되게 하십니다. 은혜가 그냥 단지 마음에 스치는 기쁨이나 평안이 아니라 삶의 능력과 열매가 되게 하십니다. 평안이 곧 힘이 되게 하십니다. 아이디어와 개념적으로 잡혀 있던 진리들이 살아 있는 능력과 확신과 힘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참된 회복이요, 능력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지만 참된 예배자는 주님께서 찾으시며, 그 시간을 주님께서 더욱 기다리십니다. 우리 자신과 기도와 회개와 찬송과 감사와 영광이 주님께 드려질 때 주님은 그것을 받으시며 기뻐하십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 말씀에 반응하고 결단하고 찔림을 받을 때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심으로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안다면 결코 예배를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유희가 아니라 희생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며,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절대 그분을 발견할 수 없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는다’(A.W Tozer). 예배는 희생이지 이익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편리와 유익을 추구하는 교회 생활과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예배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분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리이다.](25). 당시 사마리아의 일개 창부에 다름없던 여인도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해 지식이 있었고, 그분이 하실 일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그분께서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실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죄인들의 열렬한 소망은 바로 메시야의 오심이요,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여자는 메시야가 오기만 하면 그 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메시야를 통해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소망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메시야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어떻게”가 아니라 “누구에” 에 의해서 풀립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문제 해결의 방법이요, 열쇠입니다. 이런 죄인의 입에서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죄에 깊이 빠져본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을 더욱 깊이 찾고 소망하고 기다립니다. 메시야는 결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만의 알고 믿는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욱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한 사람들은 죄인들입니다.

2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26). 드디어 대화는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습니다. “네가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 주님은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여자에게 알려 주셨고, 이미 여자에 대해 모든 것을 말씀하심으로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여자는 자기 입으로 메시야가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는데 자신이 생각하고 알고 있던 바로 그 일이 실제 일어났음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란 사실을 선포하심으로 죄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셨는데 이런 예는 요한복음 9장에서 다시 한번 발견됩니다.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분이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그분을 믿고자 하나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이가 그니라. 그가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그분께 경배하니라.](요9:36~38).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 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여자의 목마름의 문제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여자는 사마리아에서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에게 직접 말씀을 가르침 받은 주님의 직전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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