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이분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말씀: 요 4:27-35 요절: 요 4:29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증거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앞에서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28)는 말씀은 증거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보여 주고, 말씀을 증거하고, 사역을 하신 주된 목적은 바로 이 한 가지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많은 종교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란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가 누구신지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예수를 예수로만 아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참 하나님이심으로 아는 것만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증거해야만 제대로 된 증거를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와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이 둘의 차이점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니고데모는 마음에 작심을 하고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뜨러 와서 대낮에 우연히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주님이 이 여인을 찾아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입니다. 여인은 사마리아인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입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죄인입니다. 니고데모는 관원이요, 당대의 부자요, 석학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을 만큼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분명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입니다. 당대의 석학이요, 율법사요, 유대인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한 기적을 통해서 안 지식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완전함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평범한 삶도 살지 못한 아낙네요, 사마리아 여자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습니다. 기적을 통해서 주님을 아는 것보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더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유대인의 선생으로 알았던 니고데모는 입을 열어 주님을 증거 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나마 실패했습니다. “치리자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요7:48) 했을 때 니고데모는 묵묵부답,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니고데모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말은 [그중의 한 사람 곧 밤에 예수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의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가 행한 것을 알아보기도 전에 그를 심판하느냐? 하니](요7:50,51). 반면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은 그 즉시 주님을 공개적으로 증거 했고 많은 회심자를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니고데모의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인생의 결산을 보면 결코 사마리아 여인보다 낫다 할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죄악된 삶을 살았고, 밑바닥 인생을 살았지만 훨씬 많은 영적 열매를 거두었으며, 저 하늘에서 받게 될 상급은 니고데모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 이 자리에 아직도 기적이나 표적을 보기 원하는 분이 계신다면 마음으로부터 깊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함이라.](고후5:7). 니고데모의 인생보다는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이 불쌍해 보이지만 훨씬 복받은 인생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7절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와서 그분께서 그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나이까? 하고 묻는 자가 없더라.](27). 동네에 음식을 사러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목격하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메시아요 이방인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믿었겠지만 주님은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의 하나님만 되시느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물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나니](롬3:29)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가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놀랄 때까지 유대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사마리아에 대해 적개심이 많았습니다. [그분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이르되,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같이 우리도 불에게 명령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이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거늘](눅9:54). 이들은 사마리아를 몽땅 태워 버려도 될 그런 사람들의 도시라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상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 온 처지에 차마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나이까?” 이렇게 묻지는 못했습니다.

28절입니다. [여자가 물항아리를 버려 두고 도시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하되,](28). 물을 길으러 왔던 여자가 물 항아리를 버려두고 도시로 들어갔다는 점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이는 메시야를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영적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은 물질적인, 육신적인, 세상적인 문제에서 자유하게 되는 법입니다. 분명 물이 필요해서 물을 길으러 왔지만 생명의 샘을 그 속에 얻은 후에 물 항아리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빈민 선교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빵을 준 후에 복음을 전하려 하지만 사실 빵을 받아먹은 다음에는 복음이 들어가지를 않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반면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육신의 빵 문제는 별 문제가 아님을 쉽게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안 여인의 태도는 용기 그 자체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낮에 온 여자가 도시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매우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피해 다니던 사람이 돌변해서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도시에 들어가 만난 사람들(men)은 남자들이었는데, 율법에 따르면 이 여자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형편입니다. 자기를 죄인으로 보는 사람들을 찾아가 말을 했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복음이 그 여자 안에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기쁨을 주었습니다. 두려움을 몰아내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인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합니다. 누구를 만나든가 말을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는 순간 증거자가 됩니다. 저는 제가 처음 구원받은 그날 집에 돌아온 즉시 전도하러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친구 어머니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자신에게 껄끄러운 사람들에게 입을 열어 증거 하는 일을 전혀 두렵지 않게 만듭니다.

29절입니다. [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분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29). 여자는 와서..보라!고 단순히 외쳤습니다. 전에 주님은 요한의 제자 둘이 따라왔을 때 “와 보라”하셨습니다(요1:39). 빌립은 나다나엘을 전도하면서 [와 보라](요1:46) 했습니다. “와서 ...보라”는 가장 짧고도 분명한 전도 방법입니다. 여인의 이 말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약간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녀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현재 있는 남편도 남편이 아니란 말을 하셨음에도 그녀는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자신에게 말한 사람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도시에 있던 남자들이 귀가 확 열릴만한 말입니다. ‘네가 행한 일이 뭔지 알고는 있군!’ 할 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행한 모든 일이란 더럽고 추하고 죄악된 것들뿐인지라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수치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자는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고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증거 했습니다. 여자는 성경 구절을 들고 논리적 증거를 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솔한 간증으로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그분이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두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두려움이나 거리낌이 없지만 악한 양심은 언제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것은 곧 공포의 대상이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오기 싫어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악한 행위, 숨겨 놓은 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 현장에서 주님을 만났는데, 그것을 간증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도둑질을 하는 순간, 불이 딱 비취면서 직통으로 걸렸지 뭔가. 그 때 주인이 그냥 경찰에 넘겨줄까, 내가 하는 말을 들을래? 하면서 복음을 전하더군...” 이런 말은 평생 간증하지 못할 그런 내용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자신의 모든 일을 자기에게 말한 주님에 대해서 증거 했습니다. 일곱 마귀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의 간증이나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여자의 구원 간증은 개인적으로는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힘든 간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진솔한 간증은 사람을 주님께로 이끌어 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30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도시에서 나와 그분께로 오더라.](30).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가 사람들을 주님께로 나아오게 했습니다. 이는 놀라운 일입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여러 사람의 구원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초대 교회의 부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간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길 선주 목사는 장로 시절에 자기 친구 미망인의 돈 100불을 사기 친 것을 공개적으로 회개했고,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만 아니라 방위량(블레어)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다며 보기에도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구르며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성도들도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했는데,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 했습니다. 그 때 온 회중은 다 울었습니다.

원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은 1903년 중국 여 선교사 화이트의 내한을 계기로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이 모임은 곧 장로교 선교사와 일부 한국인 신도, 침례교 선교사들도 참여한 연합 기도회 모임으로 발전됐습니다. 기도모임 중에 캐나다 출신의 하디 선교사가 자신의 무력함을 회개하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강원도 지역에서 선교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다며 자신의 무능함을 털어 놓았습니다.그는 무능한 원인을 우월 의식과 자만감, 권위주의 때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디 선교사의 고백은 다른 많은 한국 선교사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 때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주님 앞에서 참된 회개, 죄에 대한 고백은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며, 죄인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끈이 됩니다.

31-32절입니다. [그 사이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간청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잡수소서, 하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하시니](31-32). 죄인 하나를 구원하는 일은 영혼의 기쁨과 만족을 가져옵니다. 주님은 물을 얻어 마시지 못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갈함과 주림을 느끼지 못하셨는데, 이는 영적 양식이 육신의 양식을 대신했음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양식인데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오랫동안 ‘사랑과 영혼의 만찬’을 나누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런 영적 만찬을 즐기시고자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晩餐)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 우리의 몸은 초라한 장막집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 들어오시고자 서서 문을 두드리시고, 이곳에 들어오셔서 만찬을 드시고자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항아리가 필요 없었듯이 주님은 제자들이 주는 음식이 필요 없었습니다. 욥은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라고 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 번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식사를 거르는 것은 별 문제 없었지만 성경을 읽지 않고 거르는 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은 영의 양식을 필요로 하고, 육신은 육의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40일 동안 몸의 금식은 가능하지만 40일 동안 성경읽기와 기도없 이 살라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속사람이 견디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창시자인 도슨 트로트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는 것, 즉 성경 암송에 투자된 시간보다 투자된 시간당 더 큰 수익 배당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새 신자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말씀을 섭취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성경 암송은 새 신자로 하여금 가장 빨리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줍니다."라고 하면서 강력히 성경 암송을 훈련해 나갔습니다. 제가 아는 선교 단체 회원들은 대학 4년 졸업 때까지 600 구절을 암송했는데 이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영적 양식으로 삼는 법을 제대로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군대에 갔을 때 아주 작은 성경이 한 권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저는 붉은 신구약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가지고 군에 갔는데 훈련 도중에 쉬는 시간에 읽을 책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 때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아주 작은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보내 주도록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기쁨을 맛 본 후로는 성경을 읽지 않고는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의 간증만이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살아남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인 제시 밀러의 간증입니다. 그는 그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군은 나의 성경을 가져갔습니다. 차라리 내 오른팔을 잃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바로 그 때 성경 말씀을 암송해 둔 것이 내게 큰 복이 되었습니다. 나는 포로 수용소에서 성경 없이도 성경 공부 모임을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새겨져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삶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거듭 거듭 계속되는 위험하고 고통스런 순간마다 암송한 말씀들이 생각났고, 내게 큰 힘을 주었습니다. 나는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나는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4장에서 인용하신 신명기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또 한국 전쟁 중에 많은 아군 포로들이 중공군의 세뇌에 시달려 굴복해 버렸지만, 성경 말씀을 암송한 사람들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도 능히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국군 포로들과 미군 포로들 주머니에서 나온 작은 성경 구절을 적은 메모지를 통해서도 확인된 사실입니다. 월남전에서 포로로 잡혔던 미군들 가운데 7년간 수용돼 있다가 석방된 제리 싱글턴 소령이 석방 직후 한 보고에 의하면, 포로들은 성경 말씀이 그들의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임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제정신을 유지하도록 해준 것은 성경 말씀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나무로 펜을 만들고, 잿물로 잉크를 만들어 암송했었던 성경 말씀들을 화장지에 적어서 신발이나 옷 속에 감추었다가 보초의 눈을 피해 돌아가며 읽고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 말씀들이 너무나도 소중했습니다. 몇 년 후 월맹 당국은 한 번에 몇 시간 동안만 영어 성경을 한 권 주고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포로들은 희미한 불빛 아래 다 모여들어 돌아가며 큰 소리로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성경은 말 그대로 양식이었고, 물이었으며, 빛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런 체험이 전혀 없는 성도들은 그 안에 영적 생명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주를 찾기에 목말라 했던 것같이 성도들은 주의 말씀을 찾기에 목이 말라야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기에 목이 타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보이리요?] (시42:1~2). 이것은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영적 양식을 필요로 하는 속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33절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매](33).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육신의 배고픔은 견딜 수 없었지만 영적 굶주림, 갈증 등은 별로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 중에 육신적인 것을 영적으로 생각해서 이해를 못한 경우가 있고(마15:11), 반대로 영적인 것을 육신적으로 생각해서 이해를 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마16:6).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 중에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 같은 이스라엘의 선생조차도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위대한 자라고 늘 지혜롭거나 나이 든 자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욥32:9)는 말씀대로일 뿐입니다. 영적 문제에서는 인간적인 외모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고, 영적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주신 지각의 눈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주님이 의도하신대로 깨닫기 위해서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은 필수적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여러 차례 오해했고, 그때마다 책망을 듣기도 하고, 먼 훗날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야 깨닫게 된 것도 있었습니다. 불신자는 기본적으로 지각의 눈이 멀어있습니다. [그들의 지각(知覺)은 어두워지고 그들 속에 있는 무지(無知)와 그들의 마음이 눈먼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엡4:18). 고로 영적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에 성도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 불신자가 끼어들면 외국어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그래서 사람들은 반드시 거듭나야만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은 필수적입니다. [이에 그들의 지각(知覺)을 여사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눅24:45). 주님께서 제자들의 지각을 열어 주셨듯이 우리의 지각을 열어 주셔야만 우리는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됩니다. 욥기 33:16에는 [그분께서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그들을 위한 교훈에 인(印)을 치시니](욥33:26)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여사 나로 하여금 주의 법에서 나오는 놀라운 것들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기도했는데 성령의 조명을 간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의 힘으로, 예리한 직관과 관찰로, 교육의 힘으로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여시고, 눈을 열어 주시며, 지각을 열어 주실 때에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는 설교를 들을 때 금방 알아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지능지수가 뛰어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신 것입니다. 진리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로 하여금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신 것과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라.](요일5:20).

이는 전도할 때에도 필수적입니다. 나의 말재주로, 지식으로, 변론으로 혼을 이겨올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예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성경 지식이나 말재주를 믿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전도할 때 열매가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두아디라시(市) 출신의 자주색 옷감 장수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우리의 말을 들으매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시므로 그녀가 바울이 말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니라.](행16:14).

영적인 진리를 아는데 또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는 올바른 성경 교사입니다. [내시가 이르되,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요? 하고 빌립에게 청하여 올라와 같이 앉으라 하니라.](행8:31). 주님은 성경 교사를 통해, 목자를 통해 성경을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사역을 맡기신 분들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합니까? 성도들이 교회의 정규 집회에 빠지지 않는다면 성경에 관한 한 무식하거나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신앙 위인도 지역 교회의 출석 없이 견고한 믿음을 소유한 예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 출석을 하지 않고도 신학교를 다니고, 신앙 서적을 통해 충분히 지식을 쌓을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영적 양식이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목양의 관계를 통해 양들을 먹이시고 돌보도록 정하셨습니다. 복음서의 제자들이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주님의 목양의 결과이지 스스로 체득하거나 도(道)를 깨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나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목양을 통해 성장했지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제자들의 서신이나 가르침을 통해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3:15 [내가 또 내 마음에 맞는 목양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먹이리라.](렘3:15). 이는 비단 전도에만 해당 사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된 후에 영적 성장에도 꾸준히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의 지각(知覺)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엡1:17,18). 사도 바울의 이 기도는 성도들을 향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주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의 말씀을 잘 못 알아듣기 십상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이런 까닭에 우리도 그것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이것을 원하였노니 곧 너희로 하여금 모든 지혜와 영적인 깨달음에서 그분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게 하시고](골1:9). 기도는 성경 공부와 이해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저자와의 대화입니다. 주님은 성경의 저자이시며, 성령은 성경의 해석자이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깨닫기를 열망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영적 지식의 빈약함을 느끼고, 자신의 부족을 느낍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보화를 캐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이 있으며, 자신이 믿는 바를 정확히 알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학교 공부, 취업 공부, 취미 생활을 할 때만큼, 뭔가를 성취하려고 달려갈 때만큼 성경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까?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지고, 참고 논문들을 찾고, 분류하며 밤을 새우는 그런 열성을 성경에 쏟아 부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절제하며 몇 년씩 법전에 매달리는 그런 열정을 한번쯤은 성경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한번의 집중 호우가 물줄기를 바꿉니다. 한동안의 집중적인 성경 공부는 인생의 항로를 바꾸어 주며, 나의 가치관, 나의 습관, 성격을 뜯어 고쳐 줍니다. 잠언 28:5 [악한 자들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주를 찾는 자들은(seek)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심마니가 산삼을 찾듯이, 서부 개척자들이 금광을 찾듯이 그렇게 찾아야 합니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고 감추어진 보배들을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그때에 [주] 두려워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아는 것을 발견하리니 이는 [주]께서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자신의 입에서 내시기 때문이로다.](잠2:4~6).

하나님은 우리가 무지 속에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하심이라.](고전2:12). 주님은 무엇인가를 알려 주시기를 원하시며,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중요한 한 가지는 사람됨입니다. 우리나라에 비인부전(非人不傳)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지 않습니다. [비웃는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지식은 깨닫는 자에게 쉬운 것이니라.](잠14:6), [분별 있는 자의 지혜는 자기 길을 깨닫는 것이려니와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잠14:8). 비웃는 자, 어리석은 자는 깨닫지 못합니다. 악인들, 교만한 자들은 주님이 오히려 마음을 가려 버리시며, 눈을 감게 해 버리시고 강한 미혹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이는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사 깨닫지 못하게 하셨음이오니 그러므로 그들을 높이지 마옵소서](욥기17:4). [기록된 바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무너뜨리고 분별있는 자들의 명철을 쓸모없게 만들리라, 하였으니](고전 1:19).

3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니라.](34). 주님은 자신이 가진 양식이 무엇인지 밝혀 주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하셨는데 한 명의 혼을 이겨 오는 것은 바로 훌륭한 양식이었던 셈입니다. 구령자는 사람 낚는 어부라고 한다면 한 명의 혼을 구원한 것은 한 마리의 고기를 잡수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양식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이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왔음이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모든 사람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이것이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라.](요6:37~40).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명을 구원하기 위해 저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의 혼을 구원하러 저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의 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계16:17,21:6)는 말씀이 선포될 때 까지 주님은 계속해서 일하십니다.